외과 임상실습학생의 주 활동은 수술방 참관이다. 보통 교수님 뒤에 두 칸짜리 작은 계단을 놓고 올라서서 숨죽이고 수술을 구경하는데, 가끔은 교수님이 수술에 참여하게 해 주실 때가 있다. '어시를 선다'고도 하고, '스크럽을 선다'고도 하는데, 대단한 일을 시키려는 게 아니라 수술을 가까이에서 보여주기 위함이다. 학생을 어시 세울 때 교수님은 보통 '손 씻고 와~'라고 말씀하신다. 이때의 손 씻기가 바로 의학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는 손 씻기, 스크럽(scrub)이다.
수술 전에 손을 씻는 이유는 내 손을 무균 상태로 만들기 위함이다. 이 '무균 상태'라는 것은 말 그대로 균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말하는데, 수술은 반드시 무균 상태에서 시행되어야 한다. 사람의 겉에는 균이 많은데, 배를 열고 들어가면 균이 하나도 없는 무균의 공간이다. 꼭꼭 씹어먹은 음식에 있는 균만으로도 장염이 생기는데, 배를 열고 직접 균을 집어넣으면 얼마나 큰 감염이 생길지 예측할 수도 없다.
환자 뱃속에 들어가는 수술 장비들은 특수한 소독 과정을 거쳐 무균 상태로 만들어진 뒤에 사용되고, 수술에 참여하는 의료진들은 손을 최대한 깨끗이 소독한 뒤에 무균 소독된 수술복과 장갑을 착용하게 된다. 수술방 전체가 무균 상태라면 편안히 움직이며 수술을 하겠지만, 수술방 전체를 무균 상태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사가 직접 수술을 하는 공간인 '수술 필드'와 의사의 '머리와 목을 제외한 상체 앞면'만 무균 상태이고, 의사의 등, 하체를 포함하여 수술방의 다른 모든 공간은 무균 상태의 반대 개념인 '오염 상태'로 간주된다.
무균 상태가 오염 상태와 단 0.1초라도 접촉하는 순간, 오염된 것으로 간주한다. 의사는 수술하는 내내 어떤 부분이 무균이고, 어떤 부분이 오염인지 항상 신경 쓰고 있어야 둘이 접촉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혹시 발생했다면, 즉시 자진 신고하거나 목격자가 신고해줘야 더 큰 오염을 막을 수 있다. 보통은 손을 다시 씻고 수술복과 장갑을 교체하는 정도에서 끝나게 되는데, 오염이 심각하면 수술 필드를 새롭게 세팅해야 할 수도 있다.
머리와 목을 제외한 상체 앞면만 무균 상태이기 때문에 수술하는 의사들은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많이 하게 된다. 신내림 받듯이 두 손을 위로 향한 자세나, 가슴 가운데에 두 손을 곱게 모으고 있는 자세, 추위에 떨듯이 양 손을 반대쪽 겨드랑이에 넣는 자세는 모두 혹시 모를 오염을 방지하기 위한 자세다. 함부로 다른 사람을 만질 수도 없다. 어떤 교수님은 심히 답답하셨는지 정신 못 차리는 전공의에게 박치기로 참 교육을 선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반대로 웃지 못할 방법으로 무균 상태를 오염시키기도 한다. 내려간 안경을 무심코 올리다가, 흐르는 땀을 자연스럽게 손등으로 닦다가, 다리가 아파서 잠시 어딘가에 기대다가, 또는 꾸벅꾸벅 졸다가 오염시키는 경우가 많다. 나도 실습 중 지금 생각하면 귀여운 실수를 한 번 했는데, 당시에는 정말 아찔했다. 수술복을 입고 팔 부분을 당겨서 몸에 맞게 만드는 과정이 있는데, 긴장해서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간 나머지 5초 전에 입은 수술복을 그대로 찢어버린 적이 있다. 당황해서 멍하니 있는데, 옆에 있던 간호사가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다시 씻고 오면 된다고 해줘서 겨우 정신을 차린 기억이 난다.
무균 상태는 우리가 생각하는 깨끗한 상태와는 차원이 다른 상태다. 빡빡 문질러 설거지를 하고, 음식을 뜨겁게 데우고, 바닥을 쓸고 닦고, 옷을 깨끗이 빨고 다려도 절대 무균 상태에는 도달할 수 없다. 무슨 짓을 해도 전부 오염 상태인 것이다. 이 중요한 사실은 나의 귀차니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사용되곤 한다. '어차피 오염인데 뭐하러 청소를 해?' '어차피 오염인데 하루만 더 입자.' '어차피 오염인데 나중에 한 번에 치우자.' 균들 덕분에 편하게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