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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호 Aug 12. 2020

내가 있는 곳이 가장 힘든 곳

의대생이 되면 첫 2년의 예과 생활은 상당히 편한 편이다. 공부 쪽에 한해서는 그렇다. 졸업하고 병원에 취업할 때도 예과의 성적은 매우 낮은 비중으로 계산되며, 예과 성적이 형편없더라도 교수님이 "예과 때는 좀 놀았네?" 하시면 멋쩍게 "네" 하면서 실없는 웃음 한 번 지어주면 큰 타격 없이 넘어갈 수 있다. 반대로 예과 이후 4년의 본과 생활은 학업적으로는 꽤 힘든 편이다. 배우는 과목이 다양하고, 수업과 시험도 매우 많다. 이때의 성적은 이후 인턴과 레지던트 지원 때 큰 비중으로 반영되기에 한 과목도 소홀히 하기가 힘들다.


내가 예과에서 한창 잘 놀던 시절, 본과의 선배들이 늘 하던 소리가 있었다. "예과 때 많이 놀아둬", "본과 오면 진짜 힘들다", "죽을 거 같다" 등의 절망적인 이야기들이었다. 또한 본과는 고학년이 되면 병원에 실습을 나가는데, 내가 본과 저학년일 때는 본과 고학년 선배들이 와서 "병원 실습은 이거보다는 낫다" "2년만 버티면 편해" 등의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런데 내가 직접 겪은 바로는 의대 6학년 동안 힘들지 않은 시기는 없었다. 공부만 놓고 보면 언제가 힘들고 언제가 편한지 구분이 가능하지만, 인생이란 측면에서 보면 어느 위치에 있든 고난의 연속이었다.


예과 때는 공부는 거의 안 했지만 노느라 힘들었다. 수많은 동아리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매일 피시방에서 밤새 게임하며 몸을 혹사했다. 술 먹는 것도 힘들었다. 매일 같이 불러대는 선배들과 함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항상 만취할 때까지 먹었고, 토를 많이 하다가 피가 섞여 나온 적도 있다. 대학에서 새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 역시 힘들긴 매한가지였다. 선배들은 혼내고, 동기들은 싸우고, 후배들은 답답하고, 나는 무력했다. 착한 사람이 될지, 나쁜 사람이 될지 고민도 많았다.


본과 저학년 때는 공부하느라 힘들긴 했지만 예과 때보다 딱히 더 힘든 시기는 아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선배들이 말했던 '죽을 거 같은' 정도의 고통은 없었다. 공부는 공부대로 하고, 예과 때보다 여유 시간은 많이 줄었지만 시간을 쪼개 동아리 활동도 하고 게임도 적지 않게 병행했다. 선배들이 잔뜩 겁준 거에 비하면 오히려 편한 시절이었다.


본과 고학년 때는 공부량은 이전보다 줄었지만 오히려 좀 더 힘든 느낌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양복을 차려입고 교수님 회진을 따라도는 것도 힘들었고, 교수님마다 본인만의 가르침 방식이 있는데 그에 맞춰서 사전에 준비해 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또한 대부분의 평가는 발표 과제로 이루어졌는데, 일반적인 공부보다 시간을 훨씬 많이 잡아먹는 경우가 많았다. 6학년 동안 무엇을 했든 간에 항상 바쁘고 힘들게 열심히 살아왔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졸업 후 인턴을 할 때도 힘들었고 레지던트를 하는 지금도 여전히 힘들다. 일이 많고 적고, 몸이 편하고 고되고에 상관없이 그냥 이런저런 이유로 계속, 어쩌면 평생을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살아오며 깨달은 것이 있다. 내가 있는 곳이 가장 힘든 곳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내가 겪어본 인생은 물론 겪어보지 못한 모든 인생에도 적용해야 한다.


후배들이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대해 물어보면 이것저것 알려주며 끝에 한 마디 붙인다. "지금이랑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주변에 "힘들다", "죽고 싶다" 말했던 사람들 모두 정해진 과정을 잘 마치고 자기의 길을 걸어 나가고 있다. 새로운 고통이라고 더 강한 고통인 것은 아니다. 적응의 동물인 인간은 어떤 고통이든 결국에는 적응해내어 비슷한 힘듦을 느끼며 살아간다. 또한 나와 다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고통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다. 초등학생의 삶이 성인의 삶보다 편하다 말할 수 없고, 최저시급 노동자의 삶이 재벌의 삶보다 힘들다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나의 삶은 다른 사람의 삶보다 힘든 삶도 아니고 편한 삶도 아니다. 


이렇게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힘들게 살아간다는 것을 깨달으면, 인생에서 가장 불필요한 감정 중 하나인 부러움과 질투가 사라진다. 다른 사람처럼 되어봤자 달라질 게 없으니 누군가에게 부러움과 질투를 느낄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부러움과 질투가 없으니 모든 일에 항상 만족하고 항상 행복하다. 내가 있는 곳이 가장 힘든 곳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역설적으로 인생의 매 순간이 행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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