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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호 Aug 05. 2020

잘난 척이 아니고 잘난 거

나를 나답게 하는 문장

초등학교 1학년 때 교내에서 주최하는 웅변대회가 있었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대회에 출전시켰고, 나는 어머니가 직접 작성한 A4 용지 여러 장의 대본을 열심히 외워 무대에 올랐다. 통일을 주제로 하는 웅변이었는데, 내용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웅변 마지막에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이 어린 연사! 소리 높여! 외칩니다!" 했던 부분은 확실히 기억이 난다. 어머니의 좋은 대본 덕이었는지 나의 큰 목소리 덕이었는지는 몰라도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고, 이후로 발표에 굉장히 적극적인 학생이 되었다. 수업 시간에 발표할 일이 있는 경우에는 항상 손을 번쩍 들고일어나 큰 소리로 발표했고, 발표 시간 외에도 선생님 말 끝이 물음표로 끝나기만 하면 바로바로 대답을 쏟아냈다.


나의 적극적인 태도에 선생님들은 항상 칭찬일색이었다. 그때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성인이 되어 사람들 앞에 몇 번 서보니 작은 반응이라도 해주는 사람의 존재가 정말 큰 힘이 되는 것을 알게 됐다. 아마 당시 선생님들도 비슷한 마음이었을 다. 선생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친구들과도 잘 지냈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 몇몇 동급생들이 나를 잘난 척한다고 공격하더니 '잘난 척쟁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웃으면서 "아니야~ 아니야~" 했지만 초등학생의 어린 마음에는 꽤나 상처가 되는 별명이었다. 열심히 발표를 했을 뿐인데 잘난 척쟁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많이 억울했다.


당시 다니던 수학 학원의 원장님이 나의 억울함을 풀어주셨다. 원장님은 강의 실력도 뛰어나고, 훌륭한 인성에 유머 감각까지 겸비하여 내가 잘 따르던 분이었다. 잘난 척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했던 어느 날, 수업 중에 나도 모르게 원장님께 고민 상담을 해버렸다. "애들이 저보고 잘난 척쟁이라 놀려요." 원장님은 듣자마자 조금의 고민도 없이 말씀하셨다. "잘난 척이 아니고 잘난 거야. 애들이 놀리면 그렇게 대답해." 그 어떤 수학 문제의 답보다도 더 명쾌한 해답이었다.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 어찌 잘난 척이겠는가. 그것은 잘난 것이고, 다른 이의 잘남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열등감에 사로잡혀 프레임을 씌우고 공격하는 사람이 못난 것이다.


원장님의 한 문장으로 인하여 잃어버릴 뻔한 정체성을 다시 붙잡을 수 있었다. 이후로는 누군가 나를 잘난 척쟁이라 공격하면 오히려 칭찬처럼 느껴지면서 웃음이 나왔다. 웃으면서 "잘난 척이 아니고 잘난 거야~" 하면 상대방 도리어 말문이 막히곤 했다. 몇 번 그렇게 한 뒤로는 공격하는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고, 나는 하던 대로 열심히 수업에 참여했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2학년 때 학교 폭력 사건의 피해자가 되며 오랜만에 잘난 척이란 단어를 다시 듣게 되었다.


당시 친하게 지내던 다른 반 친구가 있었는데, 소위 말하는 일진까지는 아닌데 일진과 가끔 어울리는 친구였다. 어느 날 놀이동산으로 소풍을 갔는데 지나가다 만난 그 친구가 우스꽝스러운 머리띠를 하고 있길래 장난으로 "OO아~ 그거 벗어~ 안 어울려~" 했더니 그 친구와 같이 가던 일진들이 막 웃었고 그 친구만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무탈하게 소풍을 마치고 학교에 도착했더니 일진들 열댓 명이 몰려와서는 그 친구가 나를 때리고 싶어 한다며 풀밭으로 끌고 가서 나를 둘러다. 그 친구는 내가 자기를 기분 나쁘게 했다며 다섯 대만 맞자고 하더니 전혀 아프지 않은 물주먹으로 나를 다섯 대 때렸다.


몸의 통증은 전혀 없었지만, 다수에게 둘러싸인 공포감과 저항하지 못한 무력감이 상당했다. 초등학생 때 잘난 척쟁이 별명 이후로 오랜만에 자존감이 떨어지는 경험을 한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께 이야기하였고, 어머니는 즉시 담임 선생님께 전화를 하다. 다음날 선생님의 호출로 교무실에 갔더니 나를 때린 친구와 둘러쌌던 일진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반성문을 쓰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내가 원하면 더 큰 징계를 할 수도 있다고 하였는데, 그때 그 친구의 담임 선생님이 나에게 한 마디 하셨다. "네가 평소에 잘난 척을 많이 해서 쌓인 게 많았대. OO이가 잘못한 건 맞지만 너도 평소에 조심 좀 해."


당시 상당히 화가 나 있던 상태였는데, 오랜만에 '잘난 척'이라는 단어를 들으니까 마음속에서 조건 반사처럼 웃음이 나왔다. '뭐야, 그런 거였어?'라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내가 무슨 큰 잘못을 해서 그런 일을 당한 줄 알았는데, 열등감에 사로잡힌 친구의 괜한 트집 같은 감정적인 공격이었던 것이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니 떨어졌던 자존감이 한순간에 회복됐고, 분노와 복수심 역시 곧장 사그라들었다. 가해자들이 더 이상의 징계를 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고, 이후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와 똑같이 학교에 다녔다.


그 날 이후로는 잘난 척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겸손해지려고 많이 노력하기도 했고, 주변인들 역시 나이가 들수록 잘난 것과 잘난 척의 구분이 명확해져서 불필요한 공격을 하는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나를 두 번이나 자존감의 위기에서 구해준 "잘난 척이 아니고 잘난 거"라는 문장이 내 마음속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금은 문장의 앞뒤가 바뀌어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 "잘난 거 아닌데 잘난 척"이라는 새로운 문장이 나를 나답게 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과거 학교에서의 나는 누구보다 잘난 사람이었고, 당당하게 잘났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 10년 넘게 살아오면서 세상에는 정말 잘난 사람이 많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과거에는 잘난 척이 아니라 잘난 거라고 하고 다녔는데, 지금 보니 잘난 거 하나 없는데 잘난 척하는 진짜 잘난 척쟁이였던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괴리를 발견한 나의 자존감은 다시 흔들리게 되었, 이 자존감의 위기를 해결하는 방법은 명확했다. 다시 잘난 사람이 되는 것. 지금은 잘나지 않았지만 꾸준히 노력하여 언젠가 "잘난 거 아닌데 잘난 척"이라는, 나를 지칭하는 문장이 틀렸음을 증명해내는 것이다.


"잘난 척이 아니고 잘난 거"라는 문장 흔들리던 내 어린 마음을 잡아줬다. "잘난 거 아닌데 잘난 척"이라는 문장은  내 마음이 방황할 때면 나타나 필요한 곳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준다. 목표를 잃고 헤매고 있을 때 가야 할 곳을 알려 주고,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샘솟을 때 따끔한 일침을 가해주며, 지쳐서 쉬고 싶을 때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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