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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이쑤 Sep 05. 2023

 퇴근한 아빠를 맞이한다는 것

가족의 의미에 대하여 

결혼을 왜 해야 하는지 모를 때가 많았다. 

무언가 확신도 없으면서 남들이 다 한다고 하고 싶지 않은 청개구리 심보가 결혼에도 발동된 것이다. 

하긴 할 건데 그게 언제인지도 모르겠고 남들이 다 하긴 해도 덜컥 겁부터 나던 시절이 꽤 길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던 것이다. 내가 좋은 와이프가 될지, 내가 마음이 갑자기 변심해서 바람을 피우고 싶거나 하면 어떻게 될지 확신이 없었다. 


어릴 때에 나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 항상 아빠의 퇴근길엔 정말 중학생 이후 때까지 아빠가 퇴근하면 항상 집에서 아빠가 오는 문소리나 집에 차가 들어왔다는 알람 소리를 통해 아빠가 도착했음을 예감 했다. 그리고 문이 열리면 반갑게 동생과 나는 아빠에게 아빠를 부르며 안겼다. 참 별일 아닌데 크고 나서 결혼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그게 결혼의 꽤 많은 별 거 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튜브에서 장영란도 꼭 결혼 후의 철칙이라고 했다. 퇴근 후의 남편을 반갑게 맞아주는 것이다. 장영란도 예상키론 남편보다 훨씬 더 벌고 늘 일을 했을 테지만 이는 사회에서 만든 롤에 따라서 아빠를 아이와 아내가 가장 반갑게 맞아주는 것 그 행위에서 오는 가족의 끈끈한 1분의 시간이 얼마나 값진 의미를 가지는지 되뇌게 되었다. 


작년엔 정말 내 삶 그리고 우리 가족을 삼킬듯한 큰 재해가 있었다. 누구의 탓도 댈 수 없고 너무도 평화롭던 가정에 한순간 드라마 같은 억울하고 분한 재해가 들이닥쳤다. 엄마와 동생은 몇 주간 일상에서 눈물을 흘렸고 나와 아빠는 기분은 좀 다운되었지만 단 한 번도 이로 인해 울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아빠와 부모님에게 어떤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들만 가득했을 뿐이다. 누군가에게 우리 가족의 좋지 않은 이야기를 알리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고, 우리가 잘못한 것은 없는 억울한 일이었지만 법은 적법하게 피땀 흘려 열심히 살아온 우리 가족에게 시련의 시간을 가져다주었다. 


 일단 나도 마음은 찢어졌지만 아주 가까이에 있는 친구들은 그날도 그 이후에도 내가 눈물을 흘리지 않고 엉엉 울지 않는다고 대단하다고 했다. 운다고 해결될 일은 없었다. 운다고 해결될 수 있었으면 백번 천 번이고 울었을 것이다. 그 일을 겪는 순간 한없이 기분은 다운되었지만 그 안에서 감사한 것을 찾아내려 애썼다. 그래도 굶어 죽지 않아서 다행이다. 길거리에 나앉지 않고 이렇게 편안한 소파와 집이 우리를 지켜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내가 어느 정도 뒷받침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세상에 오히려 쉴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들만 가득했다. 지나고 보면 나도 그때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꽤 크게 받았었는데 남들에게 크게 티 내지 않았던 것 같다. 돌이켜보니 그때의 내가 얼마나 괴롭고 마음적으로 힘에 붙이고 힘들었는지 가늠이 되는데 그때는 나를 돌볼 겨를조차 없었다. 


파워 F였던 동생은 일상 속에서도 몇 줄을 엉엉 울었다. 엄마도 매일 밤 나에게 전화와 몰래 눈물을 훔쳤다. 슬픔은 전염되어 나의 마음도 요동쳤지만 눈물은 흐르지 않고 그들의 감정을 받아주고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났을까 회사에서 시간에 쫓겨 일을 하고 있었는데 다짜고짜 동생이 전화가 왔다. 시간이 되면 당장 내일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자는 것이었다. 매일을 울고 있다고 했다.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마음이 너무 속상하다고 했다. 나도 속상하긴 한데 우리가 가서 과연 달라질까 싶었지만 나는 공간에 대한 자유는 조금 있으니 동생이 휴가를 써서 부모님 곁을 지키기로 했다. 


 막상 우리가 집에 내려간다고 해서 그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큰 일을 겪고 성인이 된 자식 둘은 하루종일 침대에서 울고 있을 엄마의 마음을 괜히 다른 데로 시선을 돌리는데 집중했다. 괜히 엄마의 무릎에 누워서 티브이를 보거나 이것저것 음식을 해달라고 조르고 밖에 나가서 산책을 했다. 예쁜 카페에도 가고 그 와중에 틈틈이 일도 했지만 일단 엄마와 동생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이 급선무였다. 별거 안 하고 있어도 마음이 너무나 힘들고 가족의 큰 위기가 왔을 때 가족이 함께 있다는 것,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일상들로 함께 살부비고 지내는 것에 대한 가치가 이리도 큰 지 처음 느꼈다. 


 고등학생쯤 되고 나서 우리가 학원에서 늦게 마치는 일들이 잦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아빠의 퇴근길에 우리는 대단한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방 안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을 때가 많아졌다. 그렇게 대학에 가서 멀어지고 종종 연락을 하고 우리 가족은 그래도 자주 연락하고 지냈지만 여전히 아빠와의 물리적 거리는 어릴 때처럼 가깝지 않았다. 


 그렇게 엄마와 뒹굴거리고 하루를 보내고 나면 새벽 4시 반에 나가 발이 부르트도록 동동걸음을 하며 hectic 같은 하루를 보낸 아빠가 녹초가 되어 밤 11시에 집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지친 모습이었지만 우린 그 7살 때의 천진난만 표정을 하고 괜히 머쓱하지만 어린양을 부리고 퇴근하는 아빠에게 안기면서 장난을 쳤다. 눈밑의 주름과 시름 그리고 한숨으로 가득 찼던 아빠의 하루에 자식들이 퇴근하는 아빠에게 달려가 안아주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시 껄껄 웃는 그 웃음이 그날 첫 웃음이었을 아빠라는 것에 확신했다. 엄마는 아빠가 하루종일 제대로 먹지 못했을 거라며 야식을 먹지 않는 우리 가족이지만 아빠가 올 시간에 맞춰서 분주하게 야식을 준비하고 있었고 동생과 내가 아빠와 말장난을 치는 동안 엄마는 아빠를 위해 음식을 만들며 대화했다. 살면서 부모님이 정말 큰 고비들을 두 분이서 손 꼭 잡고 정신력으로 이겨내는 모습들은 보았지만 이번처럼 지옥같이 삭막했던 그 매일매일을 마주하며 힘들어했던 순간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주일을 누가 보면 의미 없이 엄마의 머리맡에서 장난을 치고 아빠에겐 현실적인 이야기들보다 괜한 농담 따먹기로 같이 밥을 먹고 웃어댔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아 이래서 가족이라는 건 필요하구나. 삶을 살아가는 가장 fundamental 한 요소구나. 가족의 의미는 진짜 큰일이 닥칠 때 구구절절 느껴진다. 요즘처럼 혼자 살아가기 편한 세상에서 가족을 이루기 위해 많은 희생을 하고 또 힘든 것들을 자처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면서 행복한 순간은 배가 되고 슬프고 버거울 만큼 힘든 순간엔 그 아픔이 경감될 수 있는 것이 가족의 역할이었다. 


참 별거 아닌 아빠의 퇴근길을 반갑게 온 가족이 맞아주는 것은 가족의 의미를 꾹꾹 눌러 담은 가장 가치 있고 귀한 순간들이었다. 


가정을 지킨다는 것, 가장이 된다는 것, 그리고 가족을 이루고 살아간다는 것 모두가 감사하고 애틋한 매 순간임을 인지하고 습관적인 감사와 인사들은 가족들끼리 제일 먼저 나누면서 살아야 우리의 삶 전체가 풍족해지는 것이었다. 정말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처럼 옛 어른들의 말은 틀린 게 없다. 


지금은 부모님과 떨어져 살지만 내게도 가족이 생기면 꼭 남편의 퇴근길에는 내가 이 세상 가장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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