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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이쑤 Apr 19. 2016

엄마에게도 꿈이 있단다.

통장에 불어나는 잔고보다 엄마와 여행이 값진 이유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세상에 엄마를 가진 모든 이에게, 아니 부모님을 가진 모든 이에게 감히 하고 싶은 말이다. 이번 여행을 돌이켜보면 꿈만 같은 시간의 연속이었다. 누구보다 화목하고 살가운 우리 가족이라 여겨왔다. 성인이 되고서 객지에서 생활할 때에도 어김없이 하루에 한 번씩 영상통화를 하고 늘 여행하고 맛집을 찾아다니며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즐거운 가족이었다. 그래서 서로를 너무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것일 뿐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화목하다고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여겼던 것이 얼마나 안일한 태도였는지 깨닫게 해주었다. 함께 여행한다는 것은 한 집에서 함께 생활을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었다. 24시간 눈을 뜨면서 눈을 감을 때까지 모든 의사결정에 있어서 한 마음이 되어 함께 행동하고 서로 배려하고 각자의 생활 습관과 마음속 저 깊이 있는 사소한 가치를 공유할 때 엄마와 나는 진정으로 가까워졌다.


 사실 엄마와의 해외여행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캐나다 유학을 마치고 내가 틈틈이 여행한 도시들을 위주로 내가 느낀 미국을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땐 1년이 넘도록 한국말 제대로 써본 적 없을 만큼 한국말이 어색했고,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도 익숙지 않았던 탓인지 그냥 여행은 해야 하는 to do list에 불과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엄마에게 소개하여주고 함께 좋아했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했던게 지난 미국 여행이었다면, 이번엔 가고 싶다고 한 번도 마음먹은 적 없는 생뚱맞은 스위스라는 나라에 외국 공기 코에 좀 쑤셔 넣으면 나를 돌아보는 객관적인 시간을 좀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서 결심한 여행이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엄마와 꼭 같이 가고 싶어서 준비하고 기획한 여행은 아니었다. 우연히 시간이 남아 refresh 하는 차원에서 여행사에서 뜬 자유여행 딜을 봤고, 가격이 싸서 알아봤더니 2명 이상이어야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적 여유가 있는 엄마에게 의사를 물어보았고 내가 직접 항공권과 호텔을 예매하는 게 더 싸게 여행은 시작되었다.

 흔히들 어른들은 스위스를 좋아한다. 그런데 내가 찾았던 초 봄의 스위스는 자연을 보는 것을 심드렁하는 내 입장에서 싸게 여행을 가려면 한 사람이 더 필요로 했고, 엄마는 스위스를 한번 가보고 싶었다는 이유로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봄의 시작에 유럽을 찾았다.


파리, 감칠맛 나게 낭만 한 스푼을 맛보다.

 엄마는 동네 아줌마들과 함께 여행사에서 가는 여행을 가곤 하신다. 그때도 프랑스 남부 지방에 잠시 내린 적이 있지만 에펠탑을 본 적은 없다 하셨다. 나는 개인적으로 파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순수하게 여행으로 온 적이 없었고, 또 하나의 사회생활을 어린 나이에 경험했던 파리는 복잡하고 지저분하게 말은 안 통해서 답답한 도시였다. 그때의 일주일간의 파리를 되짚어보자면 다른 어떤 좋은 것보다 가장 좋았던 것은 개선문에 올라가서 에펠탑을 바라다보는 순간이었다. 그것 말고 파리는 시간이 갈수록 내 기억에서 가장 빨리 발화되고 있던 세계 유수 유명 관광지 중 하나였다.

 그렇게 에어프랑스 리무진을 타고 엄마와 개선문을 찾았다. 표를 사고 입구에서 짐 검사 때문에 한 시간쯤을 꼬박 기다린 후엔 이미 밖엔 어둠이 짙게 내렸다. 내가 지난번 느꼈던 그 순간처럼, 해가 지고 어둠이 오기 전의 파리를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었는데 어째 여행 초반부터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틀어지는 것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에펠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비가 한 두 방울씩 떨어지는 샹젤리제 거리를 걸었다. 에펠탑에 가려고 했지만 장시간 비행으로 컨디션이 온전치 않아 문닫힌 샹젤리제 거리만 둘러보고 에어프랑스 리무진에 다시 몸을 실었다.

 막차 바로 전에 있던 리무진 버스엔 엄마와 나만이 유일한 탑승객이었다. 기사 아저씬 만으로 25살이라는 내게 버스값을 할인해 주었고 호텔이 어디냐고 물어 힐튼 에어포트라 했더니 터미널 1에서 내리면 된다고 하셨다. 가뜩이나 돌아오는 버스 안에선 비가 더 많이 내리고 있었고 터미널과 붙어있는 호텔이긴 했지만 다시 터미널 내의 열차를 타고 호텔을 찾는 것도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그냥 다리 쭉 뻗고 쉬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컸다. 그러던 와중 아저씨는 파리판 츤데레처럼 힐튼 호텔 앞에 차를 대어 주시더니 내리라고 하신다. 손님이 우리말 곤 없어서인지 기사 아저씨는 센스 넘치는 기지를 발휘하셨다. 똘레랑스의 나라 프랑스에서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배려를 선물 받은 것이 여행 내내 감사함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취리히, 본격적인 여행에 앞서 스위스를 가늠하다.

 나름 장거리 비행엔 자신이 있었다. 서울과 토론토를 오가며 (직행이 아닌 환승으로) 근 20시간쯤 되는 비행을 몇 번 하고나니, 전 날 꼬박 밤을 새우고 나면 비행기에서 수면제 먹은 듯 집중해서 잠이 오고 비행기에서 내리면 그것처럼 개운할 수 가 없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장거리 비행 때문인지,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인지 괜히 복잡한 마음에 48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제대로 마음 놓고 잘 수 없었다. 호텔에서까지 최소한의 잠만 자고 다시 아침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파리는 본격적인 여행에 앞선 애피타이저 격이었다면 스위스야 말로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이자 이유였다. 그래서 더 긴장을 놓을 수 없었던 것 같다. 호텔에서 주는 조식을 마음 졸이며 허겁지겁 먹고선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 EU 국가라는 것이 이리도 효율적이고 좋은 것인지 몰랐다. 짐을 따로 실을 필요가 없었던 우리는 입국심사도 필요 없었고 그냥 비행기표만 보여주고 바로 게이트로 직행할 수 있었다. 엄마는 내게 이럴 때 보면 참 허점 투성이라고 지적하신다. 1~2% 부족한 헛똑똑이라 말씀하신다. 나도 인정하긴 싫지만, 이럴 때 보면 참 선별적으로 내가 무딘 분야엔 한도 끝도 없이 무딘 사람임을 깨닫게 한다.

 블로그를 찾아다 보면 취리히에 볼 것이 없다고 스킵하고 다른 스위스를 둘러보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여행 좀 전문적으로 다닌 사람들은 오히려 남들이 등한시하는 취리히에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많다며 취리히를 한번쯤 둘러볼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모든 이의 의견을 귀담아듣지만 여행에선 내 취향에 맞는 여행지를 취사선택할 수 있을 때 진짜 주체적으로 하는 여행의 묘미라 여기고 있다. 그래서 나는 취리히에 도착하고 짐을 맡기자마자 바로 전차를 타고 프라이탁 매장으로 향했다. 프라이탁의 업사이클링에 대한 가치를 다룬 다큐를 몇 번 접하고 프라이탁을 맨 사람들을 보면 어떤 세상의 패셔니스타보다 개념 있는 소비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란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다. 한국에선 프라이탁이 비싸서 사고 싶었지만 망설이게 되는 가격이었는데 역시 현지에서 쇼핑하는 의미가 있듯이 가격과 종류, 그리고 구매 선물로 카드홀더까지 받게 되어 만족스러운 쇼핑을 끝내고 엄마와 바젤로 향했다. 바젤로 가는 내내 기차에서 펼쳐지는 풍경은 환상 그 자체였다.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풍경이 왜 스위스가 관광대국인지 납득이 가능하게 만들었고 모든 것이 우유 cf의 컷으로 써도 손색이 없는 프레임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기차 안의 사람들의 표정과 자세에서 선진국의 예의와 여유를 한껏 느낄 수 있었다.

여행에서 좋은 것을 보고, 화려한 것을 보는 것도 좋지만 현지의 사람들로부터 느낄 수 있는 자세와 아우라를 몸소 체감할 때 스위스의 아름다운 자연이 더 가치롭게 느껴졌던 이유는 배가되었다. 스위스 여행은 날씨가 전부라 했다. 여행이 다가오면서 매일 날씨를 체크했던 나는 흐린 날의 연속이라 크게 기대하지 않고 있었는데 막상 스위스에선 쨍하게 화창한 날씨의 연속이었다. 적당한 습도와 마음을 녹아들게 하는 기온 덕에 처음 스위스를 마주했던 순간은 감사하기 그지없었다. 세상의 모든 감각이 더 진귀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바젤을 둘러보고 취리히로 돌아와 홀리카우 버거를 두둑이 먹고선 다시 짐을 찾아 인터라켄으로 향하는 기차에선 우연히 스타벅스가 있는 기차를 타게 되었다. 세계에서 기차 안에 스타벅스가 있다는 유일한 곳이 스위스였고 기차가 달릴 때마다 밖에 보이는 풍경은 달라져서 신기했다. 늘 가던 스타벅스이자 한국이 아닌 스타벅스도 꽤나 익숙한 내게 기차 칸 내에 진동하던 커피 원두 냄새와 가벼운 맥주를 즐기거나 컴퓨터를 켜서 업무를 하는 사람들의 조합은 새로웠다.


인터라켄,엄마에게도 꿈이 있단다.

 세상엔 여러 멘토들이 많다. 젊은이들의 꿈 멘토로 가장 내 머릿속에 깊숙이 남아있는 사람은 여러 저명인사 중 김수영을 꼽고 싶다. 그리고 내가 대중매체를 통해 체감하기에 아줌마들의 꿈 멘토는 김미경 강사가 떠오른다. 아침방송에서 그녀의 강의를 보고 있노라면 아줌마들도 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꿈에 다가가는 주체적인 삶을 강조한다. 엄마도 어릴 땐 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엄마'라는 이름 아래 우리의 진학 문제와 가정을 메꾸는 조력자로서 늘 아빠와 우리들을 서포트하셨다. 인터라켄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나는 엄마의 꿈 리스트를 들었다. 엄마가 꿈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고 엄마 입에서 엄마 자신의 꿈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적잖게 당황했다. 늘 내가 하고 싶은 것만 엄마에게 요구할 줄 알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내 사정에 맞춰 내 기준에서 엄마에게 효도하고 선물하려 생각했지, 엄마를 언제나 위하고 있지만 진작 엄마가 원하는 것을 들어봐야겠단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엄마는 올해 하고 싶었던 엄마의 꿈 리스트 중 하나가 행글라이더여서 꼭 한국에서도 행글라이더를 타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하셨는데 인터라켄에 그런 기회가 있다니 해보고 싶다 하셨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처음 고백한 엄마의 꿈 리스트를 짓밟을 수 없었다. 내가 기절해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주체적으로 엄마의 꿈을 들어주고 싶었다. 예상처럼 엄마는 잊지 못할 경험을 하셨고 나는 죽다 살아나는 아찔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많이 반성했다. 직장이 없다고, 집안일만 한다고 치부했던 우리 엄마도 여전히 꿈을 가지고 사는 당차고 멋진 여성이었다. 언제나 하고 싶은 것이 많지만 우리를 위해 희생하느라 엄마가 하고 싶은 것은 늘 뒷전으로 밀려나 우리가 헤아려드리지 못했음이 한없이 미안했다.


체르마트, 마테호른에 닿기까지 설렘을 만끽하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붙들어 메고 햇빛이 좋을 때 조금이라도 많은 곳에 가고 싶었던 우리는 체르마트로 향했다. 인터라켄보다 더 다양한 국적의 관광객이 체르마트에 묵고 있었고, 훨씬 숙박시설의 규모도 컸다. 대부분 산에 갈 일정이 있는 사람들은 아침 일찍 산을 찾지만 우리는 오후 3시가 넘어서 정상에 올랐다. 체르마트역에 내리자마자 구름을 뚫어 낸 마테호른이 눈에 띈다.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포스가 있고 위엄이 있는 산이었다. 옛 선조들이 산신령, 혹은 산에서 내려오는 속설과 산의 기운에 기대어 제를 지내어 주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나온 말인지 느끼게 해줄 만큼 아우라가 넘쳐흘렀다. 산 앞에서 함부로 깝쭉거리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 같은 근엄함이 뚝뚝 묻어났다.

남들이 다 가는 융프라우 대신 마테호른을 오른 것이 신의 한 수였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그냥 남들이 다 간다는 이유만으로 융프라우가 너무 싫었다. 그리고 내 귀에 정말 강하게 꽂힌 한마디는 융프라우에 올라가면 스위스 국기랑 사진 찍고 내려오는 것밖에 없다는 멘트였다. 누군가는 현지 날씨 사정에 의해 시시각각 바뀌는 산 위에서 융프라우는 최선의 선택지라고 했지만 나는 모험을 택했다. 우리가 마테호른을 찾았던 3월 말의 봄날은 눈이 떠지지 않을 만큼 밝은 햇빛이 강하게 비추고 있었다. 토블론 초콜릿에 나오는 산, 마테호른은 반가웠고 웅장했다. 전망대에서 마테호른을 보는 거리가 꽤나 되는 듯했지만 산의 결을 느끼기에 충분한 포스의 강력함때문에 그것은 문제 될 사항이 아니었다.


루체른, 리기산의 숨결을 느끼다.

 루체른 역도 생각보다 컸다. 루체른이 주는 도시의 냄새를 제대로 맡기도 전에 역에서 내리면 한데 몰려가는 사람들을 따라 걷다 보니 자연스레 리기산 유람선 선착장이었다. 눈만 마주 보아도 서로를 아껴주기 바빴던 노인 커플을 보며 진짜 사랑의 의미는 우리가 가늠하는 것보다 더 원색적이고 간단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루체른 호수 위에서 바라다보는 루체른의 전경은 취리히보다 더 화려하고 섬세했다. 스위스는 같은 자연인데, 앞에서 보고 뒤에서 보고 옆에서 보고 멀리서 보면 또 다른 감탄사를 자아내는 매력적인 여자 같은 존재였다.

 이 풍경을 눈에 담기 버거워 셔터를 누르고 진짜 기껏해야 5분밖에 더 흐르지 않은 것 같은데 산악열차를 타러 갔더니 다음 열차가 오기까지 1시간을 기다리라고 한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정신과 남들에 비해 1시간이 늦춰졌다는 다급함, 오늘 하루 루체른 말고도 로잔이나 몽트뢰까지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그 계획이 몽땅 망가지는 것 같아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부질없는 스트레스였는데 여행지에서조차 내 마음대로 풀리지 않을 때 당황해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뒤돌아보고 반성했다. 툭 튀어나온 입을 겨우 넣고 엄마는 나를 달래 트래킹 코스를 걸었다. 하지만 이렇게 산악열차를 놓치게 된 것이 리기산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다. 지독하게 날씨 하나는 좋았던 스위스 루체른을 온몸으로 여유롭게 느낄 수 있었다. 막상 정상에 올라갔더니 별게 없었고 많은 사람들의 북적임에 더 정신없고 허무했다. 인생이란 속도보단 방향이란 말도 있듯이, 참 진부한 말이지만 이번 여행에서도 또 인생을 배웠다. 조금 늦어도 괜찮고, 그리 괴로워하지 않아도 지나고 나면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일들이 많다는 것이다.


베른, 로맨틱한 곰의 도시에서 녹아내리다.

 스위스 패스를 이용해 최대한 적게 걷고 있는다고 여겼는데도 늘 2만보에서 2만 5 천보쯤을 걷다 보니 쥐도 새도 모르게 피로가 누적되었나 보다. 게다가 시간을 아낄 것이라고 동이 트기 뜨기 전에 인터라켄을 빠져나와 밤 9시 이후에 늘 호텔에 도착하는 일정의 반복이 되다 보니 아무리 하루에 3,4시간을 기차에서 멍하니 앉아있다고 하더라도 일정을 소화하는 것 자체가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베른을 찾은 이유도 인터라켄과 가까이 있는 도시에 들러 조금이라도 스위스를 더 느끼고 싶다는 욕심에서 시작되었다. 스위스의 수도라는 베른엔 곰말고 딱히 볼거리가 없었다. 우뚝 솓은 빌딩도 없었고 화려한 네온사인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 전형적인 도시의 상징물들이 없었지만 베른엔 거리 한쪽 켠에 선 전문 오케스트라 뺨치는 예술가들이 연주하는 음악이 있었고, 베른 시내를 한눈에 바라보며 피크닉을 즐기는 여유로운 사람들이 대신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를 들어 베른이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취리히보다 덜 유명하지만 그렇다고 아쉬워할 필요가 없었다. 동물원을 찾지 않아도 도심 속 공원에서 곰들을 볼 수 있고 시내를 관통하는 큰 도로엔 다른 모양을 띄고 있는 화려하고 귀여운 분수들이 베른이라는 도시를 풍부하게 만들고 있었다. 굳이 눈을 사로잡을만한 볼거리가 없는데 왜 베른을 찾느냐 묻는다면 스위스스러운 도시의 모습과 정갈한 중세의 역사가 잘 어우러진 곰의 도시를 절대 스킵할 순 없다고 답하고 싶다. 늘 보던 풍경과 한 끝 차이라지만 베른은 유달리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밀라노, 패션의 도시에서 먹고, 자고, 사랑하라!

 스위스의 비싼 물가와 짜고 맛없는 음식을 피했지만 소매치기의 위험을 늘 걱정하며 찾았던 밀라노에서의 3일은 눈과 입이 즐거웠다. 밀라노가 도시의 명성에 비해 규모가 작아 반나절만 해도 충분하다던 지인의 여행 조언과는 달리 내가 좋아하는 화려한 브랜드들이 모여있고 패셔니스타들이 많다는 밀라노는 뭔가 달라도 다를 것이라 확신했다. 남들이 찾는 볼거리 말고도 시내에 있는 아웃렛에 가고, 자연주의 화장품 가게를 들리고, 아침 일찍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표를 확보해서 저녁에 다시 그림을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그것 말고도 밀라노가 왜 패션의 도시인지 충분히 느끼게 하는 편집샵들과 eataly의 근원지인 토리노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태리에서 제대로 된 eataly를 느낄 수 있었다. 뉴욕만큼 visual merchadising 혹은 쇼윈도 디스플레이를 다양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은 없다고 느꼈는데 밀라노가 보이는 것에 대한 근본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 수 위라는 생각도 했다. 물론 취리히의 가구와 인테리어 디자인도 개성 넘치고 실용적이라 정신을 쏙 빼놓았다. 헬싱키의 디자인 디스트릭트보다 더 과감하고 감각적인 영감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호텔에서 체크아웃할 때, 스위스나 이태리나 마찬가지로 도시세가 은근히 오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1박당 1인당 5유로씩 계산해서 내면 예상하지 않았던 돈이 나가는데 팁을 따로 주지 않고 세금도 늘 포함된 가격에 익숙한 나는 왠지 나중에 통보하는 것이 찜찜하게 만들었다. 역시 여행 예산은 내가 계산한 금액보다 1.5배에서 2배는 더 넉넉하게 짜 놓아야 한다. 현지에선 사고 싶은 것도, 예상치 않게 돈을 써야 하는 일이 늘 생기기 때문이다.


베니스, 중세시대를 그리다.

 원래 밀라노에서 3일을 여행할 계획이었다. 엄마는 나보다 더 체력이 강하신지, 혹은 여행에 대한 기회를 활용하고자하는 마음 때문이셨는지 당일치기라도 근교에 나갔다 올 것을 제안하셨고 급하게 알아본 기차표 덕분에 주말에 1+1 딜을 이용해 계획에도 없던 베니스를 갔다. 광장의 가운데서 울려 퍼지는 연주를 들으며 오감이 만족스러운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아기 땐 엄마와 똑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하는데 크면서 아빠 판박이라는 소리만 기억한다. 하지만 여전히 호탕하게 웃고 눈이 일자가 될 만큼 환하게 웃는 내 모습이 엄마와 똑 닮아 있었다. 이렇게 엄마와의 여행은 서로의 닮은 점을 찾고 상기하게 한다. 세상에 좋은 것들을 엄마와 함께하고 느낄 수 있어서 감사했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엄마는 당신의 아들도 세상의 가치로운 것들을 함께 배우고 부딪칠 수 있는 기회가 닿지 않아 안타까워하셨고 나는 아빠도 이번 여행을 함께 했다면 여행이 몇 배로 즐거웠을 텐데, 늘 텔레비전을 통해 보는 한국 밖 풍경이 아니라 남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아빠가 이번 여행을 다녀왔다면 더 실감 나게 몇 달을 여행의 여운을 안은채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렇게 가족과의 여행은 서로를 위하고 그리워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남긴다.


암스테르담, 고흐의 도시에 담긴 자유에 대한 책임론

 사실 올 때 갈 때 전부 암스테르담을 경유지로 선택하고 싶었다. 암스테르담을 위주로 한 여행을 계획해볼까 생각한 적도 있었고 에디킴의 뮤직비디오에 담긴 운하의 도시 암스테르담은 오묘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마약이 합법인 곳이다. 캐나다에서도 친구들은 마리화나를 담배와 비슷한 인식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마리화나를 하는 아이들은 담배는 사람을 죽이지만 마리화나는 치료제로 쓰인다며 하나같이 담배보다 더 낫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내 눈엔 도찐 개찐이지만 마리화나를 파는 가게와 카페에도 마리화나를 넣은 쿠키나 스콘 등을 파는 곳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 마리화나뿐만 아니라 도시 자체가 샌프란시스코처럼 자유스러웠다. 법과 규칙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가 느꼈다. 바쁜 듯 여유로운 네덜란드 사람들의 일상엔 늘 자전거가 함께 했고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집들의 색깔과 지붕의 모양은 어딜 가나 그림이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그렇게 스쿠르지라는 명성은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klm 비행기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승무원이 쓰레기를 정리할 때 컵은 컵대로, 트레이는 트레이대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쓰레기마저 효율적으로 정리하고 버리는 모습을 보고 이 나라 사람들의 습관 하나, 하나에서 참 작은 이 나라가 어떻게 세계의 강대국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지 저력을 알게 해 주었다.

 고흐 박물관을 입장하기까지 1시간의 웨이팅을 하고 맞닥뜨린 고흐를 해석하는 시선은 자국에서 굉장히 풍요로운 아티스트였다. 역사도 누구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지만, 한국에서 보고, 읽고, 들은 고흐는 굉장히 고독하고 불행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동생과 주고받은 편지 이외에도 얼마나 많은 아티스트들과 교류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예술을 채찍질하며 발전시켜나갔는지 어필하고 있었다.


 고흐 작품의 늪에서 실컷 빠져있다 보니 엄마가 전 날, 발가락을 다쳤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발을 절고, 의자만 보이면 앉아서 아무렇지 않게 나와 암스테르담 일정을 소화한 엄마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한쪽 엄지발가락에 힘을 줄 수 없는 외할머니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엄마는 나이가 들수록 외할머니의 모습이 자신에게도 보인다고 말씀하셨다. 갑자기 몸이 불편해진 엄마를 내가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잠시 짊어졌다. 더 잘해주고 싶은데 뭘 어떻게 배려해야 하고 위해줘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외할머니처럼 아픈 것을 꾹 참고 살고 싶지 않다고 늘 말씀하시던 엄마였지만 엄마 역시 내가 하고 싶고 원하는 것들을 들어주기 위해 아픔을 꾹 참고 내색하지 않으셨다. 엄마도 어쩔 수 없이 외할머니가 자식들에게 준 내리사랑을 우리에게 주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이 무서운 줄 모르고 철없이 마음껏 꿈만 꾸던 그때, 마음만 먹으면 대통령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을 갖던 초등학생 시절 나는 서울이 아닌 작은 도시에서 나고 자란 것에 대한 답답함이 가득했다. 이렇게 자랄 바엔 아주 부잣집의 서자로 서울에서 화려하게 사는 삶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당연히, 부모님을 존경해야 한다는 학습내용은 내게 그리 와 닿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무 살이 되던 무렵부터 뼛속 깊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내 부모님임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고 늘 대화와 웃음이 끊이질 않는 가정에서 나고 자랄 수 있다는 것이 세상 누구보다 부럽지 않을 수 있었다. 엄마와의 여행에서 또 한 번의 큰 감사와 영광을 느낀다. 내게 감사함을 느끼게 해 준 그대, 사랑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당신과 함께라 내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은 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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