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발해의 혼
1976년생인 나는 어쩌면 무협지의 황금기를 직접 경험한 사람 중 하나 일 것이다. 1980~90년대는 홍콩 무협영화와 콘텐츠가 풍년인 시절이었고, 읽을 만한 소설이 부족했던 남학생들은 최근 해리포터가 유행할 때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무협지에 빠져 학창시절을 보냈고 무협지를 접하며 세상을 알아갔다.
처음 무협지를 접한 것은 중학교 때였다. 할머니 댁에 가면 다락방이 있었는데 안방에 붙은 다락방은 오래된 물건이나 다듬이 돌 같은 것이 있었고 삼촌방에 있는 다락방에는 바둑기보부터 시작해서 해외서적 등 다양한 책들이 쌓여있었다. (선데이서울 같은 성인 잡지도 종종 발견되었다ㅎㅎ) 그 다락방을 들락거리면서 어느 날 먼지가 뽀얗게 쌓인 무협지들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대본소용 무협지부터 영웅문 같은 무협지까지 정말 어마어마하게 쌓였있다.
무협지의 한 장면을 예로 들자면 삼촌의 다락방은 온갖 무협비보가 숨어있는 동굴 같은 곳이었다. 당시에 삼촌은 "아직 너희들이 읽는 책 아니야~!" 하면서 다락방에 고이 모셔둔 무협지들을 읽지 못하게 하였지만... 몰래 몰래 훔쳐보는 무협지만큼 꿀 맛인 것이 없었다. 또한 지금과는 다르게 당시의 무협지들은 꽤 야한 내용이 많았으므로 부모님의 눈을 피해 야설 보는 기분으로 무협지를 보는 재미는 사춘기 소년에게 남달랐다.
무협지중 처음 읽기 시작한 건 소설가 '금강'의 '발해의 혼(魂)'이었다. 이 소설은 중국의 무협소설과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 있었는데 모든 무공의 기반이 천부경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발해의 혼은 환단고기, 삼국사기 등의 치밀한 고증을 통해 탄생한 민족 역사소설이다. 그렇다보니 중국 무협에 등장하는 무공 수련법은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이 책이 출판한 것은 1988년 '정신세계사'였는데 정신세계사는 1985년 김정빈의 '단'을 시작으로 '다물', '환단고기'등을 출판하며 민족사관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증폭시킨 출판사이다. 아마도 발해의 혼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정신세계사를 통해 출판되지 않았을까? 하는 예상을 해본다.
줄거리를 이야기하자면... 발해의 후예인 주인공 대운풍은 ‘발해 복원’을 꿈꾸는 친형 대운정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출생부터 송의 대장군 육검영의 아들로 바꿔치기 당해 성장기를 보내고 발해의 고문(古文) 해독을 의뢰받으며 무림인과 관계를 시작한다. 한편, 대운정은 송나라와 무력충돌 중인 서하의 배후조정자 ‘왕대진’으로 변장하여 대운풍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대운정은 대운풍에게 ‘발해복원’을 위해 송나라와 서하, 그리고 요나라간의 전쟁을 부추기는 뇌관 역을 맡으라 강요한다. 하지만 이 과정 중에 대운풍은 발해의 잊힌 무공을 해독하여 절대적인 무공을 얻게 되고 발해의 재건을 위한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역사의 한 길에서 서로 다른 길을 택한 두 형제의 삶을 통해 발해의 재건을 보여준다. 북송 인종 때 발해의 후손들에 의해 전개되는 발해의 복권 운동을 그린 장편 소설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무공 역시 굉장히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주인공이 습득하게 되는 무공은 천부경과 환단고기에서 비롯된 발해(고조선부터 이어진)의 무공이다. 이 무공을 통해 주인공은 먼치킨급에 해당하는 실력을 갖게 되는데 사실 이 무협소설의 재밌는 점은 무협을 읽다 보면 역사를 배운 다는 것이다. 또한 환빠라고 불리는 환단고기 마니아들을 양산시킨 작품이기도 하기에 한번쯤은 읽어볼 만한 무협지다. 나 역시 이 소설을 읽은 것이 씨앗이 되어 대학시절 환단고기에 미쳐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재는 환단고기에 대해 진짜 역사가 아닌 위사 취급받는 일이 많아졌지만. 그런들 어떠한가? 한국에서 태어나서 민족사관에 대해 한번쯤 관심을 갖는 건 나쁜 게 아니라고 본다.
천존창룡보
천존창룡보는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읽은 책이다. 삼촌의 다락엔 다양한 무협지가 있었는데 '영웅문'. '소오강호'등의 김용의 소설 대부분이었고 종종 와룡생, 고룡의 무협소설도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천존창룡보'라는 책은 곱게 보자기에 쌓여있었다. 마치 무공비급을 비밀스럽게 포장해 놓듯 말이다. ㅎㅎ
사실 그 전까지 정파에 가까운 무협소설을 읽다가 대본소용으로 나온 사파의 무협지를 읽는다는 것은 또 다른 재미를 되었다. 우선 대본소(양판소)용 무협지는 세로 쓰기로 되어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가로 쓰기와 다르게 세로 쓰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진짜 무공비급 같은 느낌이 났었고 와룡강 작가의 무협지 대부분이 그렇듯이 내용 자체가 엄청나게 야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미연시나 하렘물에 가까울 정도로 주인공은 가는 곳마다 절세미인 아내를 얻었고, 그 아내들과 정사장면은 그냥 정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야릇 디테일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그게 그냥 재미거리로만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음양교합, 체음보양이라는 무공이 존재해서 절체절명의 위기가 있는 장면에선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정사가 무공을 증폭시켜 환골탈태 반로환동(무공은 강해지고 외모는 어려지는)되는 역할도 하게 된다. ㅎㅎ 당시에 와룡강의 다른 작품을 찾으러 인천 배다리에 있는 헌책방을 친구들과 삿삿이 뒤졌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사실 천존창룡보는 개인적으로 최고의 무협소설로 손꼽는 작품이다. 물론 모두에게 인정받은 무협 작품도 있고 한국적인 무협소설의 4대 천왕으로 추앙받던 금강, 서효원, 사마달, 야설록의 무협지류도 있었지만 와룡강의 소설은 그 당시 친구들 사이에서는 으뜸으로 꼽혔었다. 물론 무협지의 교과서라 불릴만한 김용의 소설, 읽을수록 맛이 나는 와룡생이나 양우생의 작품들과 초기부터 먼치킨이 등장하는 서효원의 빠르고 장쾌한 소설도 좋아했지만 와룡강의 주인공은 대부분 초반엔 눈에 띄지 않다가 뒤로 갈수록 엄청나게 강해지고 매 인연마다 19금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에 사춘기 피 끓는 청소년들에게 더 사랑받았던 것 같다. 와룡강의 무협지는 때로 섹협지, 떡협지등으로 매도되는 이유가 바로 그 19금이 빈번하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뭐... 그래서 더 좋은 것이지만...)
천존창룡보의 내용은 기억이 가물거려서 전체를 말하긴 그렇지만 원래 마교문주의 아들이었던 주인공이 18년간 귀머거리 벙어리 행 새로 마구간 잡일을 돕다가 생일을 기점으로 기연을 찾아 여행을 하는 것이 큰 줄거리다. 그런데 이 소설을 단지 무협지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소설에는 중국의 아라비안나이트라 불리는 '요재지이'에 등장하는 요괴나 용이 등장하며 그것이 무공과 연관된다. 또한 주인공이 꼭 찾아야 하는 두개의 검을 찾아 떠나는 모험에는 신선급의 무공을 가진 사람도 등장한다. 보통 인간이 평생 수련해서 얻을 수 있는 무공이 1 갑자정도인데 이 무협지에선 60 갑자 이상의 무공이 수두룩하게 등장하며 주인공과 악당세력의 싸움은 거의 드래곤 볼급의 파괴력을 보여준다. 이 정도면 판타지 소설에 버금가는 콘텐츠가 아니었나 한다.
와룡강은 대부분의 소설이 비슷비슷한 내용으로 진행되는 자기 복제가 심한 작가 중 한 명으로 욕을 먹는 작가 중 하나인데 천존창룡보는 그의 다른 소설들과 여러 면에서 다른 점이 존재한다. 또한 한번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놓기 힘들 정도로 재밌다. 이미 절판돼서 구하기 힘들긴 하지만 이책을 다시 만나는 사람은 무공비급을 얻은 것과 같은 기연을 얻은 것이리라 본다.
한국은 생각보다 무협지 강국이다. 그 시작이 중국이었다고는 하나 한국에서 발간된 양판소용 무협지만 해도 그 수가 어마어마하며, 정식 출판된 무협지만 보더라도 그 수가 판타지 소설보다 많다. 대부분이 잊어버렸거나 잊힌 콘텐츠이긴 해도 그 뿌리가 단단했기 때문에 또 다른 다양한 콘텐츠들이 생산된 게 아닌가 한다. 최근 한국적인 무협을 만들기 위해 충무로에서도 고민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곧 개봉할 '협녀:칼의 기억' 역시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기대된다.
오랜만에 오래된 추억을 더듬는 이야기 재밌으셨는지... 한국 무협이 다시 부흥하길 바라며~
오늘 이야기를 마친다. 한국 무협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