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과 아이돌
1979년 '기동전사 건담'의 광풍이 휘몰아친 후 1982년 독특한 애니메이션 하나가 일본에서 방영된다. 로봇 애니메이션 역사상 최초로 아이돌이 등장하는 '초시공요새 마크로스'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이다. 마크로스는 기존의 로봇 애니메이션이 무조건 힘과 능력만이 싸움의 기준이었던 SF/로봇/메카닉 애니계에 노래가 힘이 된다는 새로운 공식을 마련해준 희대의 걸작이었다.
이 애니메이션은 또한 기존 애니의 공식들을 단번에 업그레이드시키는 4명의 천재가 등장하는데 이타노 이치로, 미키모토 하루히코, 히라노 토시키, 카와모리 쇼지가 그 주역이다. 이 4명의 천재가 마크로스를 만들 때 사용하였던 독창적인 표현방법(작화, 동화)과 스토리텔링(이야기 구조)들은 이후에도 전 세계 팬들에게 전설적인 장면들로 추앙받는다.
마크로스의 내용은 이렇다.
서기 1999년, 북태평양, 오가사와라 제도 남아타리아 섬에 길이 1킬로미터가 넘는 우주전함이 추락한다. 이로써 외계인의 존재를 실감하게 된 인류는 지구를 하나의 정부로 통합하고 추락한 전함을 수리하여 '마크로스'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2009년 마크로스 진수식 당일, 지구 근처에 ‘젠트라디(거인족)’라 불리는 외계인 함대가 출현하자 마크로스의 주포 시스템이 자동으로 작동하여 젠트라디 군의 전함을 파괴한다(공격당한 게 아니다. 먼저 공격했다). 이를 계기로 지구 통합정부와 젠트라디와의 전쟁이 발발하고 젠트라디와의 교전 중에 군인과 민간인 약 5만 8천 명을 수용한 전함 마크로스가 명왕성 궤도 근처로 워프해 버리는 사고가 발생한다(노아의 방주가 강제로 동물들을 납치하는 것 같은 상황). 마크로스에 수용된 사람들은 전함을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고 고향 지구를 향한 긴 여정을 시작한다...
이제는 많은 영화와 만화의 모티브가 되어 조금은 진부해 보이는 마크로스의 설정은 그 당시에는 굉장히 파격적인 설정이었다. 또한 당시 참여한 인력들 대부분이 각 분야의 오타쿠였기 때문에 굉장히 디테일한 설정이 많았고 그 결과 애니메이션 오타쿠에게 먹힐만한 몇 가지 참신한 요소들이 포함하게 된다.
1. 전투기가 로봇으로 3단 변형한다.(합체가 아닌 변신!)
2. 발키리(로봇 이름)의 화려한 공중전.(이타노 서커스)
3. 우주선 안에 인간 거주구.(건담의 콜로니와는 다른)
4. 아이돌과 히트송.(린 민메이)
5. 우유부단한 주인공의 3각관계.(히카루+민메이+미사)
6. 외계인이 등장하는 SF적 소재.(젠트라디)
위에 소개했던 내용을 별개로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야기하자면 마크로스에 등장하는 인물 구도로 보는 것이 더 편하다.
"주인공인 히카루(17세)는 사실 서커스비행에 있어 톱클래스였다. 그러다가 갓 데뷔한 연예인인 민메이를 만나게 되고 첫눈에 반한 민메이를 지키기 위해 마크로스 선단의 공군에 입대한다. 입대 후 마크로스의 치프 오퍼레이터인 미사를 만나게 되는데 우주 최고 어장관리녀 민메이와 마치 어른의 향기를 풍기는 미사(실제로는 19세밖에 안된다! 나중에 알고 충격!) 사이에서 방황하게 된다.
3각관계와 더불어 마크로스선단은 거대 외계인 '젠트라디'와 싸워야 하는데 프로토컬처에 의해 만들어진 전투 종족 젠트라디는 문화와 여흥이 없다. 그렇다 보니 이들에게 남녀간의 사랑이나 노래는 금단의 영역이었고 거기서 착안한 지구인들의 공격수단은 아이돌의 영상과 음악을 전면에 내세운 노래공격!!(실제로 '민메이 어택'이라 하는)!!!! 결국 눈물을 흘리며 싸움을 중지한 젠트라디는 지구인들과 화합하며 새로운 문화를 창조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10미터급의 거인형 외계인 젠트라디는 사실, 전설의 극장판 '사랑. 기억하나요?'에서 젠트라디(남성)와 멜트란디(여성)로 나누어 종족다툼을 오래 동한해 왔다는 설정이 나온다. 그렇다 보니 히카루와 미사가 젠트라디에게 납치된 후 공개적으로 키스하는 장면을 보고 '데카르챠!(오 마이 갓!, 어머나!, 맘마미아! - 현재 오덕들은 '모에~라고 표현함)라고 말하며 엄청난 컬처쇼크를 받게 된다. 거기에 이 외계인들을 물리치게 된 계기는 엄청난 화력을 앞세운 막강한 무력이 아니다. 민메이라는 작은 아이돌이 부르는 '노래'다. ㅎㅎ(당시에도 그렇지만 지금 봐도 엄청나게 특이한 설정이다. 마치 트랜스포머 최고의 무기가 엄청나게 시끄러운 클락션이라는 괴팍한 설정과 마찬가지)
마크로스가 만들어지기 3년 전에 히트했던 '기동전사 건담'과 비교하더라도 복잡한 세계관을 이해 못하면 일반인들이 즐길 엄두도 내지 못했던 슈퍼 로봇물에 새로운 바람이 불게 된 것이다. 실제로 린 민메이가 극장판에서 불렀던 '愛・おぼえていますか(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는 애니메이션 삽입곡으론 특이하게 40만 장 넘는 판매량을 올리며 일본 오리콘 차트 top10에 6주간 머무르는 기염을 토한다. 이 말도 안 되는 컨샙의 외계인 감화용 선전음악은 거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감동시킨 것이다.
물론 단지 노래 하나로 어떻게 만화영화가 성공하겠는가? 여기엔 이타노 서커스라고 불리는 '이타노 이치로'의 화려한 공준전이 있었으며 지금 봐도 혀를 내두를 '미키모토 하루히코'가 그린 엄청난 퀄리티의 작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거기에 투장다이모스, 골든라이탄, 기동전사 건담, 모스피다, 사이버 포뮬러, 페트레이버, 에우레카 7을 그렸던 카와모리 쇼지의 메카닉 디자인이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굉장한 박진감을 더했다.(지금 봐도 천상의 삼위일체라 불릴 엄청난 조합이다)
극장판의 대성공 이후에 마크로스는 초기의 TV판과 극장판을 베이스로 시리즈화 된다. 그중 대표적인 작품이 마크로스 7, 마크로스 플러스, 마크로스 제로, 마크로스 프런티어인데. 이 시리즈들은 건담처럼 마크로스의 세계관을 연대기순으로 연결시키며 하나의 거대한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재밌는 점은 로봇 애니메이션이 시리즈화될 때 대부분의 애니메이션들은 로봇의 인기를 부각시키는 데 주력하는 반면 마크로스는 각 시리즈마다 거인과 싸우는 아이돌이 존재한다. 마크로스의 '린 민메이', 마크로스 7의 '넥키 바사라(남성 아이돌)', 마크로스 플러스의 '샤론 애플(최초의 사이버 아이돌)', 마크로스 프런티어의 '란카 리' & '쉐릴 노므'(투톱 아이돌)가 대표적이다.
마크로스는 후대 거대 로봇물에 여러 가지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하게 되는데 그중 '가이낙스'(프린세스 메이커, 에반게리온,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라고 불리는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마크로스가 없었으면 여러 히트작이 탄생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들이 만든 '이상한 바다의 나디아'에 등장하는 잠수함(후에 우주선이 된다)이라던가, '탑을 노려라'의 외계인과의 전투라던가, '그렌라간'의 최종 진화폼(항공모함형 우주선이 로봇으로 변신-마크로스에서 1킬로 미터급 우주선이 로봇 형태로 변신한다)라던가, 에반게리온에 등장하는 제3 신동경시(전투 시 요새화 되는 도시)등은 마크로스에 등장하는 요소들을 발전시킨 형태라 할 수 있다.
마크로스는 개인적으로도 추억이 많은 애니메이션이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돈을 주고 구입한 비디오가 마크로스였고(당시에 부평지하상가엔 LD라 불리는 고화질 레이저 디스크를 비디오에 불법 복사해주는 가게가 있었다. 3만 원 정도를 주고 복사했을 것이다), 프라모델을 조립하며 가장 신기해했던 게 발키리(바루끼리라 불렀다)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처음으로 가슴 설레며 사랑했던 2차원 여성이 린 민메이크였다.(시간이 지나고 보니 미사가 더 좋음) ㅎㅎ 그래서 더더욱 마크로스에 대한 애정이 깊다. ㅎㅎ
전설 속에 등장하는 유니콘은 순결한 여자 앞에서 무릎 꿇는다는 말이 있다. 마크로스는 바로 그 전설에서 비롯된 애니메이션이다. 거인과 꼭 싸워야만 이길 수 있는가? 어여쁜 아이돌의 노래 하나면 우주에 평화가 깃든다. 그것도 싸움도 희생도 없이 말이다. 오타쿠가 아닌 이들을 오타쿠로 만들어 버렸던 마성의 애니메이션이 바로 마크로스였다.
혹시 당신의 첫사랑은 어땠는지?
아직 그 사람의 얼굴이 기억나는지 모르겠다. 나는 오랜만에 첫사랑이었던 민메이가 보고 싶어졌다. ㅎㅎ
거인에 대한 세 번째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글을 읽는 당신에게 즐거움이 되었기를~
마크로스에 대한 몇 가지 재밌는 사실...
한국에 마크로스가 처음 소개된 건 사실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었다. 당시 주말이 되면 AFKN이라는 외국인 방송을 통해 영어로 된 애니메이션이 방영됐는데 그중 가장 인기 있던 시리즈가 '로보텍'이라는 마크로스 해외 수출버전 이었다. 로보텍은 사실 마크로스라고 하기 어려운데 북미권에서 마크로스를 수입하며 방영편수가 너무 부족한 나머지... 초시공시리즈 연작이라 할 수 있는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초시공기단 서던크로스', '기갑창세기 모스피다'를 억지로 크로스오버 시켜버린 것이다. 내용이 뒤죽박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보텍'은 영미권에 양덕 후를 양산하는 계기가 된다.
마크로스시리즈가 거듭되며 마크로스엔 반드시 등장하는 클리쉐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1. 주인공과 여주인공은 반드시 밀폐된 창고 같은 곳에 갇힌다(여기서 사랑이 싹튼다), 2. 나의 노래를 들어!라는 오글거리는 단어를 여주인공이 노래를 부르기 전 꼭 말한다. 3. 남자 주인공은 우유부단하다. 4. 여자 주인공은 어장관리에 능하다.(외국에선 bimbo라고 욕한다) 5. 유난히 주인공은 서커스 비행에 발군의 실력을 보인다.(공군 대장보다 더 강하다) 이상 5가지 정도에 '데카르챠~!"라는 단어를 이해한다면 마크로스를 볼 때 더 재밌게 볼 것이다.
여담으로 마크로스와 발키리(바루끼리)의 메카닉 디자인을 했던 카와모리 쇼지는 현재도 활발한 활동을 하며 일본 애니메이션 중 메카닉 디자인에 있어 천재로 칭송받는데(소니의 아이보가 이 사람 작품이다) 카와모리 쇼지는 광적인 건담덕후이자 건담을 탄생시킨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의 숭배자로도 유명하다. 어느 날 토미노 감독이 "옛날에는 장인들이 진짜만을 보고 배워서 특별히 배우지 않아도 진짜와 가짜의 구별이 되었는데, 요즘은 애니메이션들은 다 가짜라 진짜로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은 사람은 애니메이션을 봐서는 안된다!"라고 한 말을 듣고 정말로 3년 동안 애니를 전혀 보지 않고 지냈다는 거짓말 같은 일화가 남아있다. ㅎㅎ
오타쿠가 극에 달하면 천재 크리에이터가 된다는 걸 몸소 보여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