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ke Kim Apr 26. 2016

시안(試案)과 시안(視眼)

디자인 시안을 보는 안목에 관하여

얼마 전 디자인 자문을 맡고 있는 정부기관에 방문을 했다가 외부에 걸린 큼지막한 대형 배너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한 기억이 있다. 원래 거기에 걸려야 있어야 할 디자인은 전통적인 요소를 재해석하여 모던하고 굉장히 맛깔나는 그래픽 디자인이어야 했는데 어느 지방 어느 곳에서나 볼법한 관공서의 밋밋한 디자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기관의 배너와 포스터는 최근 경쟁입찰을 통해 결정된 회사가 제작하게 되어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그 회사에서 한 디자인이 아닌 것이다. 심사과정에서 여러 지지부진한 업체를 재낄정도로 눈에 띄는 디자인을 선보여서 군계일학의 실력을 보여줬던 곳인데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궁금했다. 건물에 들어가 그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공무원분께 어찌 된 일인지 여쭤보니...


"아~ 그 포스터요? 그게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업체는 열심히 했는데 내부 사정 때문에 막판에 완전 바뀌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봉황을 닭으로 만들었데요? 제가 심사한 디자인이 전혀 아니던데요?"

"심사하시고 가신 후에 몇 가지 수정사항을 전달해서 최종 포스터가 나왔어요. 그런데..."

"네 그런데요?"

"저희 쪽에 중간 컨펌을 하면서 위에 계신 분이 태클을 거셨어요. 그 태클 내용이 뭐냐면 한자가 한자처럼 안보인다는 것... 그리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이 작업한 디자이너가 해외 유학파라고 했는데 어디 출신이냐'고 ... 그래서 일본 출신이라고 이야기드렸죠. 그랬더니 '거봐~ 포스터에서 왜색이 느껴지더라니!'라고 말하시더니 확 다바꾸라고 하셨어요."

"네? 어라?"

"그래서 그 위에 계신 분께서 직접 붓으로 한자를 쓰신 후에 디자인 업체에 넘겨 메인 이미지를 바꾸게 했고 색상도 그분이 결정하셨어요. 관(기관)의 성격에 맞아야 한다면서 말이죠..."

"..........."

클라이언트 왈(曰) "난 지금 진지하다. 왜냐면 엄청나게 진지하기 때문이다."



원래는 이런 느낌이었다 (ken-tsai lee : Visual Identity of TDC Annual Exhibition in Taiwan)


분명 내가 심사했을 때 그 업체의 포스터는 굉장히 완성도가 높았다. 사용되어야 할 한자를 구조적으로 재해석했고 그리드는 탄탄하게 설계하였으며 자칫 칙칙해질 수 있는 오방색을 형광색이 섞인 별색과 적금(황동)색을 은은하게 조합해서 꽤 고급스러웠다. 들어가야할 내용(Text)은 필요한 내용을 잘 간추려서 적절한 카피로 강약 조절을 해놓았었다.


왜색? 원래의 디자인 시안은 왜색을 느끼기 힘들었다. 그냥 아름답게 잘 만든 포스터였다.


Bruno Munari, Curve di Peano, 1991-1996. Serigrafie.


또한 아동을 위한 포스터는 틀에 박힌 폰트를 사용한 게 아니라 직접 레터링하여 리듬감을 살렸고 바탕에 깔린 패턴은 색동을 재해석해 마치 브루노 무나리(Bruno Munari: 1907~1998, Italy)의 패턴처럼 알록달록 기분 좋게 만들었었다. 거기에 전체 프로젝트 비용이 넉넉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업체의 디자이너는 더 퀄리티 높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순수 디자인 작업비를 출력 및 제작비에 투자하겠다는 열의까지 보였었다.


그런데 나온 결과는?


대표적인 공공기관 포스터 (본문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공무원들이 좋아하는 짙푸른 파란색을 바탕에 깔았고 거대한 캘리그래피가 중앙에 배치되어 있었다. 담겨야 하는 내용은 너무도 정직하게 하단에 배치되어 있었다. 굉장히 경직되어 보였다. 봄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포스터라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얼마 전까지 경쟁입찰과 경쟁PT에 직접 참여했던 디자이너로서 저 포스터를 만든 디자이너와 디자인 회사의 고충이 전해져 마음 한구석이 계속 따끔거렸다.




종종 클라이언트들은 디자이너의 시안을 보며 단지 자신의 취향과 맞지 않는다고 또는 기존에 보던 것과 많이 다르다고 다른 디자인 시안을 끊임없이 요구하며 디자이너의 밤샘을 부추긴다.


나 같은 경우도 작년에 몇 건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엄청나게 많은 시안을 작업했던 적이 있었는데 결국은 하다하다 지쳐버려서 프로젝트를 포기하게 되었다. 시안의 회차는 20차까지 갔고 시안의 개수는 80개에 가까웠다. 억울했다. 그래서 울며 겨자먹기 하는 기분으로 매일 밤을 새며 작업했다. 그러다 보니 자존심도 상하고 분한 생각이 들어서 봉인했던 필살기로 전용(영문) 서체까지 만들어 디자인 시안을 넘겼는데도 통과되지 않았다. 클라이언트의 답은 항상 같았다.


"마음에 드는 게 없어요."


그 까다로운 클라이언트는 마지막에 "디자인 진짜 못하시네요. 그냥 제가 그려주는 대로 해오세요."라 말했다. 결국 울컥 튀어나오는 자존심을 씹어 삼키고 허탈한 마음에 웃으며 "NO"라고 답하고 프로젝트를 멈췄다. 프로젝트를 마치고 씁슬해하는 나에게 동료 디자이너가 이런 말을 했다.


"아마도 우린 전생에 영웅이었을 거야. ㅎㅎ"

"말도 안돼. 전생에 나라를 구했으면 미녀라도 얻어야 하는데 미녀를 만나긴 커녕....ㅠㅠ"

"전쟁에서 이겨 영웅이 되려면 적장의 목을 수도 없이 배었을 거 아냐? 업보지 뭐."

"아~ 천벌 받고 있는 중이라고? ㅎㅎㅎㅎ"


전생에 영웅이었으면 현생에는 디자이너


그래 우린 천벌을 받아서 디자이너로 태어났는지도 모르겠다. 뭐 이런 일이 나한테만 있는 일은 아닐 터. 대부분의 디자이너가 겪는 일이며 "NO"라고 하지 못하는 디자이너는 무한 시안을 뽑는 지옥의 밤을 보내야 한다.




디자이너가 클라이언트에게 보여주는 시안은 몇 가지 유형이 있다.


1.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양하게 많이 준비했어.

2. 추천하는 것은 A지만 혹시 몰라 B와 C도 했고 떨어질 시안으로 D도 마련했어.

3. A와 B. 둘 중 하나 골라. 그 이상은 없어.

4. 내사전에 시안 따윈 없어. 내맘대로 한다.

물론 4번과 같은 경우는 정말 친한 지인이 클라이언트가 아니면 불가능한 유형이다. 대부분 2번과 3번에 해당되지만 간혹 1번과 같은 상황이 되곤 한다. 아마도 1차 시안으로 결정이 되는 일이 있다면 클라이언트는 굉장한 혜안(慧眼)을 가진 분 일 것이다. 대부분 시안이 2차, 3차로 넘어가며 초기의 크리에이티브가 날아가 버려 엉망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봉황을 만들고 싶었으나 촌닭이 되는 일이 더 많다.


클라이언트가 요구하는 디자인


물론 여기에 디자이너의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디자이너는 자신의 시안을 설명하며 더 구체적이어야 하고 더 치밀해야 하며 더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에 귀기울여야 한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가? "디자이너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 클라이언트가 의뢰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을 치료하는 과정으로 보고 클라이언트라는 환자를 꼭 살리겠다는 의지로 디자인에 임해야 한다"라고 말이다. 그렇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의사가 환자를 살리기 위해 아무리 좋은 약을 처방해도 환자가 그 약을 믿지 못하고 민간치료를 신봉한다거나 자신을 살릴 의사를 돌팔이 취급을 한다면 말이 틀려진다.


끝나지 않는 디자이너의 최종본


앞서 이야기했던 공공기관의 포스터도 비슷한 사정이었을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무언가 문제는 있었겠지만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은 클라이언트가 디자이너를 의심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문제가 더 악화되어 버린 것이다. 디자이너가 단지 일본 유학파라는 이유로 포스터는 왜색 짙은 친일파가 되어 버렸고 브루노 무나리의 아기자기함은 유아적인 발상으로 취급받았다. 그런 취급을 받은 디자이너는 아마도 상처를 크게 받았을 것이다. 기존에 칙칙하고 촌스러웠던 포스터를 업그레이드 시키기 위해 밤잠을 설치며 퀄리티를 극한까지 올려놨는데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기존과 비슷하거나 더 못한 결과물을 최종적으로 내놓게 되었으니 말이다.


디자이너의 포스터 시안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모두 맞춘 포스터 최종본


시안(試案)의 사전적 의미는 '임시로(시험으로) 만든 계획이나 의견'이다. 영어는 'Draft Plan(Proposal)'이다. 그 뜻은 (아직 완성본이 아닌) 원고나 초안의 계획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디자인 시안은 절대 임시로 만들어 쓰고 버려지지 않는다. 대부분이 최종 결과물을 염두해서 만드는 계획표이자 컨샙을 결정짓는 설계도에 가깝다.


1차 시안이야 말로 디자이너의 역량이 충실히 반영된 최고의 설계도다. 그런데 그 1차 시안에서 맘에 드는 것이 없어 전혀 방향이 다른 2차, 3차 시안으로 넘어가면 디자이너가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크리에이티브는 거의 남지 않고 굉장히 일반적인 결과물이 나온다. 특히 디자인적 소양이 전혀 없는 클라이언트가 디자인의 방향성에 대해 칼자루를 쥐게 되면 자칫 표절하거나 도용하는 결과물로 이어지기도 한다.


시안이란 좋은 안목을 가진 클라이언트를 만날 때 더 빛을 발한다.


어쩌다 보니 좋은 기회가 생겨 디자이너와 디자인 회사를 평가하는 디자인 평론가 겸 자문위원이 되었지만 봄날에 좋은 햇살을 받으며 기분 좋게 갔던 정부기관에서 디자이너의 비애를 느꼈다.


많은 분들이 좋은 디자인을 찾는다. 그런데 좋은 디자인이란 그 디자인을 하는 디자이너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클라이언트의 안목도 굉장히 중요하다. 시안(試案)을 만들어내는 실력보다 시안을 보는 안목(視眼)이 더 중요한 것이다. 더욱이 경쟁 PT를 통해 디자인 회사를 선택한 경우라면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디자이너에게만 돌리는 건 흔한 갑(甲)질에 지나지 않는다. 디자이너가 하는 일의 특성상 디자이너는 항상 을(乙)의 위치에 있지만 그 을의 위치에 놓인 디자이너를 조금만 더 믿어준다면 클라이언트가 말하는 좋은 디자인을 한국에서도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디자이너의 결과물을 평가하는 그들의 눈과 취향이 조금만이라도 나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디자이너는 포트폴리오 채우기에 급급해하지 말고 자신을 믿고 인정해주는 좋은 클라이언트를 알아보는 눈을 키웠으면 한다.


<게르니카> 피카소, 1937


독일군의 바스크 지방 폭격에 의한 처참한 광경을 그린 피카소의 '게르니카(Guernica, 1937)'를 본 독일군 나치 장교가 피카소를 불러 "이런 발칙한 그림을 그린 게 당신인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피카소가 "그림을 그린 건 나지만 저런 짓을 한건 당신들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시안을 원하는 데로 뜯어고쳐 엉망이 된 디자인 결과물을 만든 클라이언트께 아쉽지만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다. "이런 후진 디자인을 한 게 당신(디자이너)인가?"라고 물어본다면 "디자인을 한건 나(우리)지만 저런 짓을 한건 당신들이다"라고 말이다.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nitro2red

매거진의 이전글 도둑질한 아이덴티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