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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미 Oct 01. 2015

세 여자

프롤로그


 회색 빛을 좋아한다. 회색 빛 외에 내가 선호하는 색은 무채색일경우가 많다.

투명하기에 모든 것과 어우러질 수 있지만,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무채색이 우울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우울함과 닮았다.


나의 우울함은 무채색과 같이 아무런배경도, 뚜렷한 이유도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더 비참하고 슬프며 견디기 힘든 우울함이다. 무채색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나는 무채색과 닮은 문체로 우리의 이야기를 붙잡아 두려 한다.

한 지붕 밑에 존재하는 세 명의 여자와 스쳐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나는 좀 더 어렸을 때, 이런 이야기를 쓰기 원했다.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의 이야기를 쓰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지연된 까닭은, 처음에는모든 것이 너무 선명하였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선명하여 어느 것에서부터 손을 대고 시작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기억들은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뚜렷해졌다.

시간이흐르자 조금씩 멀어지는 기억들을, 우리는 마음대로 끄집어내어 이야기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분명, 조금은 다른 의미에서 뚜렷해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나는, 우리의 기억들을 한 편의 글로 완성시킴으로써 우리의 기억들과화해하려 한다.


한 지붕 밑에는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과거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에게 있어 과거의 기억은 되새김질 할만한 좋은 추억이 아님에도, 그들은 늘 그것들을 되새김질 하며 그 곳에서 사는 것이다.

과거의 기억들은 그들 현재의 삶을 갉아먹으며, 그들 삶 속 깊숙이 기생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우울함의 결정체인 그 기억 덩어리들을 각자의 숙명처럼 떠받들며 오히려 위안을 삼는 것일 수도있다.


이제 그들은 숙명과도 같은, 각자의 일부와도 같은, 그 거지 같은 기억들을 떨쳐버릴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쓸 데 없는 피해의식과 피해망상 속에 살아가는 듯하다.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과 이야기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것은 동질감 형성을 위한 대화가 아니라

‘누가 누가 더 최악의 상황인가?’


이것을 겨루기 위한 대화의 장이 열리는 것을 자주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나는 항상 이런식으로 말을 하곤 한다.


"뭐 좋은 것도 아닌데 서로들 라이벌 의식을 느껴? 이상하네."

그러면 그 곳의 분위기는 한 순간 숙연해지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나를 향한 냉소의 시선이 쏟아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사람들은 힘든 과거를 회상하며 그 기억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연민에 빠져 힘들었던 당시의 상황에 감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집의 사람들 또한 예외는 아니다.

다만 조금씩 다른 형태로 머물러 있을 뿐.


한 지붕 밑에는 세 명의 여자와 스쳐가는 하나의 남자가 존재한다.

여자가 아닌 슬픈 여자, 작은 음악가였던 여자, 무능력한 사색가 여자, 그리고 그 여자들을 스쳐가는 단 한 명의남자.


작은 음악가였던 여자는 연애를 하지 못한다.

무능력한 사색가 여자 또한 연애를 하지 못한다.

그 둘의 시간은 과거 속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과거 속에서 은둔하며 그 기억들을 좀 먹어가는 두 여자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시체와도 같다.

그들은 늘 말한다.

‘나는 이미 오래 전 죽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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