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스며든 첫 번째, 철학이랄까? 인생 다짐이랄까?
다들 그러한지, 나만 이러한지 모르겠으나
나는 어린 시절 스스로를 연민의 대상으로 여겼었다.
초등학교(국민학교였다가 중간에 바뀌었다)도 입학하기 전에 부모님은 이혼을 하셨다.
이혼이 지금처럼 흔치 않던 시절이었던지라
홀아비가 된 나의 아버지는 홀로 고군분투하다가
우리 남매를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맡겼다.
나는 지금도 어르신들에게 예쁨을 받는 편인데,
그때의 친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나를 전혀 예뻐하지 않았다.
그때의 기억은
고사리손으로 밭에 나가 풀뿌리를 뽑고 용돈을 오백 원 받아
동생과 읍내로 한참을 걸어가 문방구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으며
또 한참을 돌아왔던 기억.
또 고사리 손으로 한겨울에 얼음을 깨고 양말을 빨고, 설거지를 했던 기억.
당시에는 수도관도 없어서
물을 뿌리고 힘껏 눌러서 펌프질을 하면 물이 철철 나오는 펌프가 있었는데.
큰 고무 대야에 물을 채워 놓고 필요할 때마다 썼다.
봄, 여름, 가을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겨울에는 고무 대야 속에 물이 꽝꽝 얼었던 기억이 있다.
하여간 그때의 기억은 내게 오랫동안 상처 비스무리하게 남아있었다.
엄마란 사람이 버리고 간 '나'란 애처로운 존재가
마귀 할멈 같은 친할머니에게 구박을 받고 자랐으니.
나는 스스로를 애처로운 존재로 규정했다.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은 비교적 보살핌을 받고 자랐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나는 '유치원'을 보내주지 않았지만, 남동생은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남아선호사상의 횡포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훗날, 그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아주 우연한 계기로, 생각지도 못했던 타자의 시선 덕분에.
우연히, 집에서 가까운 대학교의 문예창작학과에 가게 되었다.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이었지만, 운명처럼 전액 장학생이 되었고
"대학 뒷바라지는 못 해준다"는 아버지의 말을 핑계 삼아,
그냥 입학해 버렸다.
고백하자면, 난 문예창작학과가 뭘 가르치는 곳인지도 몰랐다.
어쨋든 난생처음 전액 장학금을 받은 나는,
'감투가 사람을 만든다.'는 옛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정말 장학생이 되어 열심히 학과 생활을 했다.
그렇게 열심히 열과 성의를 다해 들었던 수업 중 하나가
논픽션 수업이었다.
그 '논픽션'수업의 과제로 어린 시절의 기억을 써 내려갔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논픽션이라기보다
어린 시절 친할머니에게 구박을 받는 내 신세 한탄에 가까운 글이었다.
당시 교수님께서는 내게 직접 읽어보라 했는데,
난 첫 문장도 읽지 못하고 격해진 감정을 눈물로 쏟아내 버렸다.
그러자, 교수님께서 그 글을 읽어 주셨다.
내 낯부끄러운 이야기 속 오류를 하나씩 고쳐 주시며,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할머니의 입장에서는 손녀의 얼굴에서,
본인의 아들을 홀아비로 만든 며느리를 발견했을 수도 있다고.
아닌 걸 알면서도 그래서 그러셨을 수도 있다고'
'어떻게 친할머니가 나에게 그럴 수 있었을까?'
라는 전대미문의 궁금증은 한숨에 해결되었다.
'할머니 입장에선 그럴 수 있었겠다.'
집에 남아있는 친모의 사진이 없어서 확인을 못했지만,
(그 이후, 아주 나중에 확인했는데, 똑같더라.)
충분히 납득이 갔고, 심지어 친할머니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그랬다면, 되게 많이 참으셨네...'
나는 그렇게 10년 넘도록 무겁게 짊어지고 있던 미움과 연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때였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이해하고, 역지사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은 게.
내 안은 한층 가벼워졌고, 한 뼘 자란 것을 느꼈다.
물론,
그 후에도 다양한 뻘짓을 했던 것 같지만.
그래서 지금도 나는,
역지사지하며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