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1. 감포에서 토함산 자락
천년고도(千年古都) 경주.
이곳에서 맞는 새벽은 늘 벅차다. 문무왕의 산골이 뿌려진 동녘 끝 감포 바다로부터
잘생긴 화랑의 자태를 연상케하는 감은사지 탑, 너른 황룡사지, 계림의 신비로운 숲과 왕릉들,
토함산이나 남산의 능선 자락.. 어디든 그윽한 고도의 기운이 감지되는 곳들이다. 그리하여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제일 먼저 드는 고민은
‘과연 어디서 새벽을 맞을 것인가?’ 이다.
어디서.. 어디서 또 신라의 새벽 향취를 맡아볼 것인가?
감포의 새벽은 경건하다. 동이 트기 전, 동해안 여느 바다처럼 일출을 보려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쉬이 들뜨지 않는다. 해안 군데군데 누군가 켜놓은 작은 촛불들과 새벽기도를 나선 만신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예사롭지않은 이 풍광들은 해안에서 200여미터 남짓 떨어진 검고 긴 바위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사적158호로 지정된 이 바위의 이름은 대왕암이다.
서기668년, 부왕시대의 백제 정벌에 이어 고구려마저 정벌한 신라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국토는 여전히 불안정했고 동쪽 해안으로 왜구의 침범까지 빈번하였다. 그는 죽기전 자신의 유해를 화장하여 동해바다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죽어서라도 용이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념이었다. 유언대로 그의 유해는 이 곳 대왕암 바위에 뿌려졌다. 호국의 용이 된 문무왕은 대왕암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견대(사적159호) 주변에 종종 모습을 나타냈고 그의 아들 신문왕은 이곳에서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만파식적을 얻었다. 통일전쟁과 잦은 외침으로 7세기의 국토는 그야말로 피비린내나는 살육의 땅이었다. 세상의 모든 풍파를 없애고 평안하게 하는 피리, 만파식적은 호국의 용이 된 문무왕이 아들에게 전해주는 살육의 종말을 고하는 선물이었다.
대왕암이 있는 해안을 뒤로하고 929번 도로를 따라 500m쯤 가다보면 우측으로 잘생긴 두개의 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은 탑과 터만 남은 이곳은 사적31호 감은사지이다. 문무왕은 대왕암에 자신의 산골처를 정하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명당터에 절을 지어 불력(佛力)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절을 짓는 공사가 시작되었지만 완성을 보지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 이듬해 아들 신문왕에 이르러 마침내 절은 완공되었고 부왕의 은혜에 감사드린다는 의미로 신문왕은 절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 하였다.
감은사지에서는 두가지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아늑한 양북면 들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두 개의 탑이다. 얼핏보기에도 장중하면서 세련되어보이지만 이곳저곳 다니며 많은 탑들을 보다보면 이 탑이 얼마나 잘생긴 탑인지 새삼 느끼게된다. 젊고 수려한 화랑의 자태가 떠오른다. 두 기의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국보112호로 지정되어있다. 또하나는 금당(불전)의 바닥구조이다. 특이하게도 불전 밑으로 빈 공간이 형성되어있는데 이것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신문왕의 효심이 만든 독특한 공간이다. 석가탑과 다보탑도 있지만, 감은사지 탑 또한 신라의 국가대표급 탑으로 모자람이 없다.
감포에서 감은사지를 거쳐 보문호나 불국사로 넘어가는 길에 세 곳의 절과 절터가 있다. 경주 땅에 워낙 들를 곳이 많고 문화재가 지천이어서, 모르는 사람은 몰라서 지나치고 아는 사람은 바뻐서 지나치곤 한다. 그러나 경주가 아닌 여느 도시에 자리했다면 필수 방문지로 손꼽힐만큼 저마다의 독특함을 간직한 곳들이다.
양북면 안동리 함월산 기슭에 자리한 골굴암은 우리나라의 몇 안되는 석굴사원이다. 수십미터의 거대한 석회암 암벽에 12개의 석굴이 있으며, 제일 높은 곳에 골굴암마애여래좌상이 조각되어있다. 비바람에 약한 석회암의 특성상 풍화된 곳이 곳곳에 있지만, 온화한 부처의 미소가 은은하고 자애롭다. 골굴암의 창건연대나 연혁은 알려져있지 않으나 기림사 사적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아마도 기림사의 암자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원효대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골굴암은 불교무술인 선무도의 본산으로 매주 일요일을 제외한 날 선무도 시범을 볼 수 있다.
함월산 턱밑 골짜기에 자리한 기림사는 일제시대때까지만 해도 불국사를 말사로 거느릴 정도로 큰 사찰이었다.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려져있지 않으나, 선덕여왕 시절 원효대사에 의해 사세를 확장하면서 기림사로 개명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지금은 정갈한 산사의 규모지만 남겨진 문화재들이 사찰의 번성했던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사찰내 기림사 박물관에는 건칠보살좌상(보물415호)과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에서 발견된 문적(보물959호) 등이 전시되어있고, 배흘림기둥과 맞배지붕의 단아함이 느껴지는 대적광전(보물833호)도 볼만하다.
토함산을 내려서며 4번국도와 만나는 지방도는 굽이지고 산그늘이 깊은 외진 길이다. 장항리 절터는 그 외진 길켠 덤불 숲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절이름도 전해오는 것이 없어 그저 마을의 이름을 따서 장항리 절터로 불린다. 이 궁벽하고 쓸쓸한 공간, 그러나 이곳에도 손에 꼽힐만큼 멋드러진 문화유산이 숨겨져있으니 장항리오층석탑(국보236호)이다. 길은 그늘지고 외져도 절터는 양지바른 곳이어서 석탑에 새겨진 부조를 감상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특히 늦은 오후 햇살이 스민 석탑 일층몸돌의 인왕상은 감동 그 자체다. 떡벌어진 어깨와 다부진 인상, 역동적인 몸짓이 삼국을 평정한 신라 무인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절터에는 다른 한기의 석탑과 불대좌, 주춧돌과 부재들이 남겨져 있다.
답사일정
새벽의 감포 문무대왕암 - 감은사지 - 골굴암 - 기림사 - 장항리사지 - 감은사지 야경
- 일정을 서두른다면 토함산을 너머 석굴암과 불국사, 혹은 추령터널을 지나 고선사터, 천군동 절터 등을 추가할 수 있다.
- 문무대왕암이 있는 봉길해수욕장과 감포항 주변으로 어부들이 직접 운영하는 횟집들이 여럿 있다. 동해안의 타지역에 비해 저렴하며 싱싱하고 먹을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