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일기17 (2601 #상처와 흉터 #출산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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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선 <오춘실의 사계절 2025 낮은산 : 김효선 에세이
소설이 아니고 실존 주인공 인물일 거라 상상은 했지만 솔직히 충격적인 표지 사진이었다. 앞은 노랑 수영복 입은 엄마 사진, 뒤는 꽃모자 수영복 입은 딸 사진. 수영복이라 해서 몸매가 보여 충격적이 아니라 어깨까지만 드러나있고 너무 꽉 들어차게 클로즈업된 얼굴 실사라 놀랐다.
1978년부터 2024년까지 시간은 왔다 갔다 엄마 오춘실의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여러 실화로 묶인 글. 작가인 딸 김혜선은 소설 읽고 수영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장래희망이 자원재생활동가, 현직은 소설 판매직 16년 차라고 밝혔다. 역시 책 편집자인 짠바 나오게 각 장마다 좋은 책의 좋은 글귀를 넣어 이쪽 분야에서 수준 높은 사람인 걸 직감했다. 그걸 보고 나니 충격적인 표지 사진도 자신감으로 보였다. 가장 멋진 장 제목은 1993년 안산 “그 인간도 곱게 죽진 못했을 거야”! 이제는 나도 뭔가 이야기 꺼내면 30년 전, 40년 전이 태반이고 죽은 사람도 많다. 언젠가 예능프로에서 어떤 아지매가 인터뷰하는데 그렇게도 괴롭히던 시어머니, 못된 지인 등등 지금 어딨냐 뭐 하냐에 “다 죽었어”라는 말에 얼마나 포복절도했는지 내가 평생 들은 중 최고 유머였다. 근데 이제 나도 종종 죽은 사람이 나온다. 2024년엔 내게 아주 심각한 해를 가한 두 원로가 나란히 떠나셨다.
#상처와 흉터
이 책을 읽고 서울대 나온 작가가 폐지 줍고 공병 줍는 청소부 엄마의 글을 쓰며 당당함과 부끄러움에 대해 생각했다.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나의 부끄러움과 당당함. 경제 계층 아니 계급적인 면. 초등학교 5학년때인가 3남매의 막내였던 엄마의 유일한 언니가 6남매를 데리고 진도에서 진해로 우리 집으로 왔다. 작은 집이었지만 우리 6명과 같이 지내 식구가 13명이 되었었다. 큰 언니 둘은 마산수출자유지역 공장으로 출퇴근했고 동생인 아들 둘, 딸 둘은 우리 4남매랑 학교를 다녔다. 언니 둘이 나랑 같은 방을 쓸 때 새벽에 출근 준비하다가 손거울을 자고 있던 내 이마에 떨어뜨려 아직도 흉이 있다. 원망한 기억은 전혀 없는데 엄마는 속상해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딸 가진 엄마로서 이제야 든다. 몇 달 후 외삼촌이 사시던 집으로 그 식구들이 이사를 나가고 이모는 식당일을 다니셨다. 10년 후 내가 근처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시절 교사회식 식당에서 이모를 마주친 적이 있다. 반갑게 인사드렸고 동료들에게 인사도 나누게 했었지만 부끄럽진 않았다. 물론 당당하지도 않았지만. 또 딴 델 이야기가 새지만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나 뚱뚱하고 안 예쁜 내가 부끄러울까 봐 엘리베이터에서 딸과 그 친구를 모른 척 ‘해준’ 기억이 있다. 굳이 내 딸도 나를 아는 척 안 하더라. 무지 좁은 공간이었는데 ㅋ
다시 부끄러움과 당당함으로 돌아가 상처와 흉터 또는 상처와 고통쯤으로 주제를 바꾸고자 한다. 숨기고 있는 상처나 흉터, 결점이 있을 때 그걸 드러내면 더 이상 흉이 아니다. 정 안되면 나 아닌 남인 누구 단 1명에게 로라도 말할 수 있으면 더 이상 괴롭지 않을 거라 드러내라 드러내라고 한다. 사실 울 아빠가 셋이야, 우리 형제는 성이 다 달라 어느 작가처럼 온 동네에 소리칠 필요는 없어도 단 한 명에게라도 말할 수 있으면 더 이상 단점이 되지 않을 거라고. 좁은 이마도 이마를 까면 더 이쁠 수 있고 콤플렉스도 없을 것이다. 머리도 좋고 얼굴도 이쁘고 가정도 좋은데 유달리 어두운 애가 있어 보면 몸에 흉이 있거나 가정에 비밀이 있더라, 그 어두움은 자꾸 숨기려 해서 상처가 아니 흉터가 된 거다. 내 목 아랫부분에 브이넥 셔츠 입으면 보이는 곳, 목걸이 펜던트가 닿은 곳에 엄지손톱보다 약간 큰 흉터가 있다. 어릴 때 흙장난하다가 긁고 해서인지 지금도 그렇지만 애초에 뚫려있어 그런지 자꾸 덧나고 벌개지기까지 했지만 이거 성형수술까지 한 거다.(내가 나온 고등학교는 줄업식날 한복을 입었는데 깃 사이로 너무 드러나 엄마가 정말 억지로 성형을 시켜주었었다. 내가 원한 건 진짜 아니었다. 그러나 카로틴 질인 곳이라 그렇다면 누워서 수술해서인지 실력이 없어서인지 85년 1월 수술 이후 흉터의 모양만 바뀌었다.) 물론 없는 것보다 못하지만 없으면 너무 좋겠지만 이미 있는 거고 내 기억이 있는 동안 주욱 있어와서 그렇게 부끄럽지 않아 드러내고 다녔다. 너무 잘 보이게 다녀서인지 여자들은 친해지고 나면 엄청 조심스럽게 묻는다. 저~~ 거기 왜 그래요? 어쩌다 그랬어요? 되게 흉한가 보다. 남자들은 안 묻고 제자 남학생들은 '좀 가리고 다니소'라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날 좋아한다던 놈들이 더. 그 중학생 놈들은 겨드랑이가 어쩌다 보이면 '가리이소'라고 화를 많이 냈다. 심지어 샘은 순결의식도 없습니까라고 엉뚱한 단어도 썼다. 난 여자 싸이(가수)다. 땀이 많아 겨드랑이가 젖는 일이 많아서 젊었을 때에는 여름에 옷을 여벌로 가지고 다닐 정도였다. 이제는 옷감이 좋아지기도 했고 시원하게 지내기도 했고 언젠가 성형과 가서 시술도 받은 적이 있다. (알고 보니 보톡스 수십 방이었다. 친구남편이었는데 만세자세로.. 이건 부끄러웠다. 겨땀이 무땀으로 된 효능은 1년 정도 갔고 어디로 대신 나올지 모른다 그랬는데 내 경우는 셔츠 라벨 붙는 뒷목 윗부분으로 그 분량의 땀이 나왔다.)
여하튼 주변에 제자들에 난 드러내라를 강조했었고 그렇게 지도했었고 많은 상처 있는 아이들을 그야말로 구원했다. 그야말로 임상실험 수백 건 결론은 성공. 그-러-다-가 우리 딸이.....
큰딸과 둘째는 18개월 차이다. 둘 다 공부할 때 무지 바쁘고 힘들고 여유 없고 가난할 때 (미안하지만 원하지 않을 때) 생겼다. 둘째를 낳고 하루 만에 퇴원하고 온 날, 친정집에는 어른이 6명이나 있었다. 그게 어쩜 구멍이었다. 1-2명이었으면 요 꼬마를 보고 있었을 텐데 너무 많아 각자 있었다. “주야, 밥 무라,” 냄비만 한 커다란 사발에 뜨거운 미역국이 작은 상에 올려져 부엌에서 거실로 나왔고 몸 푼 지 하루밖에 안 된 나는 안방에서 천천히 일어나 나오던 중이었다. 잠시 모두 안 본 사이 아이가 제일 먼저 밥상으로 달려가서 그 국그릇을 들어마시려 했다. 펄펄 끓은 직후의 국이었고 그 걸고 샤워 아닌 샤워를 한 아이는 결국... 절대로 옷을 벗기면 안 된다는 상식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뜨거운 건더기들은 빨리 떼어내는 방법은 그 방법밖에 없었다. 빨리 식힐 방법은 없었고 차가운 물을 몇 초 내로 많이 부을 방법도 없었다, 다행인 건 아이가 어려 면 100% 내복이었어서 비록 껍데기가 벗겨져 벗긴 돼지속살같이 분홍살이 그대로 드러났지만 살째로 같이 숭덩 떨어져 나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합성이라면 포나 회를 뼈까지 뜰 뻔했다. 울면서 소리치고 병원으로 따라가고 싶었지만 ‘니 따ᆞ갈 살리려다 내 딸 죽는다’며 엄마가 말려 아직 정이 안 든, 딸이라 더 서러웠던 둘째와 나만 남기고 모두 밤의 응급실로 갔다. 얼굴과 *만 무사하고 그 조그만 전신이 1,2,3도 복합화상을 입어 전신 하얀 붕대로 감겨 미라로 돌아온 아이, 무슨 이유에선지 3500만 원이라는 숫자의 돈이 떠올랐고 (아직도 이유를 모른다) 난 기필코 이 아이를 수술해 준다고 했다. 또 천만다행으로 진해복음외과 원장님을 잘 만나 야간과 토일은 병원을 안 여는 시절이었지만 이 꼬마를 위해 매일 80일간 하루도 안 빼고 독과 드레싱을 해주셨다. 아이가 누운 자리는 누런 진물이 한 달 넘게 나왔고 독한 놈이랑 소리를 들으며 아이는 매일 그 아픔을 잘 견뎌내 주었다. 난 공부한다고 그런 아이를 두고 21일 만에 올라가 그 모든 건 우리 엄마가 다 해주셨다. (나름 삼칠일, 세 이레라고 그건 딱 지킴. 두 아이 모두 엄마 젖은 2주도 못 먹었다. 3주 중 1주는 떼기 시작해야 했으니까ㅠㅠ 누가 그랬다. 난 애를 낳은 게 아니고 싸고 온 거라고.)
또 다행히 아이가 어려 그 많은 전신 흉터가 거의 아물고, 팔 안쪽에 구겨져 뭉친 자국의 흉터만 크게 남았지만 나머지는 없어지고 무늬나 색만 남았다. 천만다행이다. 이제야 본론이다. 내 흉터보다 열 배 크지만 까서 키웠다. 경상도 거친 할매들은 가끔 내게 들리게 소리쳤다. 애미가 뭐 그렇노, 아 숭터 좀 가리고 댕기라....그래도 깠다. 성공이다, 아이가 그걸 전혀 가리지 않았다. 수술도 필요 없단다 수십 년 전 내가 울 엄마에게 한 소리다. 엄마 탓도 아닌데 (내 딸 흉은 내 탓이지만 ) 내내 맘 아파하시고 심지어 미안해하셨었다. 대성공은 그 아이의 결혼식에서 빛이 났다. 그게 다 드러난 드레스를 입는다. 우린 아무렇지도 않다. 하하하. 난 그래도 맘이 아프지만...
사람들아 보소, 얘들아 내 말 들어, 흉터는 까는 거야, 하나도 안 부끄러워, 죄나 벌이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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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들 말하니 생각난다.
또 누가 그랬다. 아이러니하게 목사부인 교사. 샘은 죄책감도 없어요? 어떻게 애를 두고 와요? 1주일마다 부모님과 아이가 있는 집으로 갔고 아이가 둘이 되면서 하나는 친정, 하나는 시댁에 맡기면서 2주 만에 한 번씩 이 아이, 저 아이를 봤다, 시간을 아끼느라 4시간 편도 운전동안 휴게소도 안 쉬고 과속으로 매주 달렸었다. 힘들었지만 선물 풀러 가는 기분이었다. 한 주만 빼먹어도 3주 만에 보는 거라 안될 일이었다. 경상도 있던 큰 놈은 헤어지고 출발하고 믿을 수 없겠지만 진짜로 세 시간 동안 눈물이 나와 대전까지 울고 왔고 강원도 있던 작은놈은 대관령만 넘으면 눈물이 그쳤었다. 시댁이라 더 맘이 아팠는데도 불구하고.
큰애는 고향에서 제법 큰 종합병원에서 낳았는데 굴욕적이었다. 여러 명이 속옷도 없이 원피스만 입고 주욱 누워 소리 지르는데 목청이 제일 컸던 나는 야단을 맞았다. 시끄럽다고. 심지어 간호사에게 맞았다. 고소할걸... 그땐 너무 아프고 정신없고 아는 게 너무 없었다. 임신도 연구실의 유부남 아저씨들이 어 임신이야 알려줬고 입덧도 힘들었지만 돈도 여유도 없어 간식은 오로지 초코파이뿐이었고 800원, 1000원이었던 학식 먹고 열 달을 지냈다. 하루 10시간쯤은 기본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공부해서 방광염도 신우염도 왔지만 그 또한 잘 몰랐다. 임신한 동안은 좋았다. 평생이 무수리 체질이라 앉아서 얻어먹질 못하는 나에게 사람들이 앉아라 먹어라 먼저 해라 해서 공주 같은 대접은 평생 그때뿐이었다. 살쪄도 되고 몸매 신경 안 써도 되고 편했다. 그래서 모두가 다 하는 거라 분만도 걱정도 안 했다. 이 여자 저 여자 모두 다 잘 낳고 잘 살고 드라마 보면 소리만 지르지 의사와 간호사들이 와서 힘내라 응원하며 나만 보며 잘 받아주리라 믿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아픈 부위도 예상과 달리 아랫배와 허리가 제일 센 생리통보다 2만 배 아파 당황스러웠고 의사는커녕 간호사도 내게 붙어주는 이는 없었다, 남편과 가족이 함께 하지 못하던 시대였다. 꽥꽥 아파 소리 지르다가 죽을 만큼 힘들었을 때 문이 열기고 애기 머리가 나와야만 분만실로 덜렁 옮겨졌었다. 난 난산이라 애기가 안 나와 오랜 산통 끝에도 안 나오고 애기 호흡이 위험해서 그야말로 집게로 꺼냈다. 원래 신생아는 숨구멍이 열린 채로 나오지만 이 아기는 그 눌렸던 자국 때문에 심슨 가족의 아들 바트 같이 땅콩머리로 한참을 지냈다. 얘 머리통이 기가 막히게 이쁜 건 울 엄마가 한 달 이상 잘 주물러 반죽하여 만들어서라고 확실히 믿는다.
그래서(!) 둘째는 작은 개인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날 잘 보살펴줄 것 같아서. 결론은 같았다. 큰 아이는 밤, 애는 새벽부터였는데 여기도 아기가 거의 보일 때까지 의사는 오지 않았다. 태교는 공부였고 큰 놈이 눈이 너무 작아 작은놈 임신 기간 중에는 눈 눈 눈만 빌었더니 코끼리 같은 쌍꺼풀 겹주름의 아이가 나왔다. 또 다행히 외모는 성공이었다. 이쁘다. 머리통은 큰 놈이 이쁘다. 우리 집 여자 셋은 옷 수치가 44, 55, 66 때로는 55, 66, 77이다. 발은 225, 230, 240이다. 뚱뚱한 내가 키가 제일 큰 건 많이 아쉽다. 제일 커도 160에서 몇 미리 부족한데 많이 아쉽다. 쟤네들을 잘 안 먹여서 그런가 보다. 못 먹인 이야기, 바쁜 엄마 공부하는 엄마 직장 다니는 엄마라 너무 바빴다. 둘째가 어린이집 때부터 내가 데려와 본격적으로 키웠는데 우리 아이들은 그놈의 '오뚜기 3분 미트볼'을 수십 박스 먹었고 집 앞 BHC 콜팝이 주식이었다. 우린 죽어도 염이 필요 없다고도 했다. 방부처리 다되어서.. 참으로 험한 소리를 해대었다. 이건 죄책감이 든다. 어릴 땐 못나서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 지금은 엄청 이뻐져서 어디서 못났다는 소리는 안 듣는다. 내 눈에도 이쁘다. 결혼식 때는 정말 예뻤다. 우리 딸은 신부대기실은 문 닫고 식장 앞 한가운데 내내 서서 하객들에게 인사했다. 여왕 같았다고 사람들이 그러더라. ㅋㅋ 별나보이기도 햇지만 자랑스러웠다. 진짜 누구보다 예뻤다.
목동에서 아기 키울 때 느낀 거, 엄마들이 자기 아이들을 정말 이뻐하더라. 심지어 세상에서 제일 이쁘다고 하는 사람도 많더라. (사실 주변에 그런 여자들이 꽤 많다) 아주 친해진 다음에 몇 명에게 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고. 큰 애가 어릴 때 못생겼고 못생겨 보이고 못생긴 게 사실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래도 귀여웠다. 참 귀여웠다. 이건 절대 비날이 아니다.
둘째는 뚱뚱하고 뚱뚱해서 뚱뚱하다 그랬는데 이게 상처가 되어 열등감을 많이 심어줬다고 아직도 나를 원망한다. 이건 아직 해결 안 됐다. 개는 이쁘고 정말 예쁘게 생겼는데 말이다. 돼지지만 진짜 돼지는 아니고 요즘 삐쩍 마른 아이들 같지 않아 통통한 정도인데 말이다. 내 아이들이 잘 먹고 많이 먹는 게 좋다.
역시 딸 얘기는 할 게 많다. 많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