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서정

by 노준성

저녁하늘 붉게 물들어 오면
먼 들녘 너머로 고향이 아른거린다
바람에 실려오는 흙냄새는
잊으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이름
내 발자국 따라 흐르던 먼지 길 위에
어린 시절의 그림자가 아직도 걸어간다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길
아버지의 굵은 숨결이 배어 있던 마루
그 위에 앉아 들었던 풀벌레 소리는
지금도 내 귓가에 남아 있다

고향의 봄은 언제나 젖은 흙냄새였다
논둑 위 돋아나던 새싹 하나
작은 풀꽃조차
세상의 시작처럼 떨리며 피어났다

개울가에서 흘러내리던 맑은 물결
버드나무 가지마다 물고인 햇살은
내 마음을 맑게 씻어주었다
그곳에서 나는
꿈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없이 웃을 수 있었다

여름의 고향은 뜨거웠다
매미의 울음은 하늘을 가득 메우고
들판은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 뜨거움 속에서
내 살결은 더 단단해지고
내 영혼은 한 그루 나무처럼 뿌리를 내렸다

흙 묻은 발로 뛰어들던 개울물
투명한 물속에서 반짝이던 돌멩이와
은빛 물고기의 떨림은
아직도 내 눈 속에서 헤엄친다

가을이 오면, 들판은 황금의 심장처럼 뛰었다
벼 이삭 고개 숙인 채 흔들리며
세월의 무게를 노래하고,
들판을 걷는 바람마저도
익은 곡식 냄새로 가득했다

그 속에서 농부들의 웃음은
햇살보다 더 깊은 빛이었고
나는 그 웃음을 보며 알았다
삶은 수확의 기쁨만이 아니라
기다림과 인내 끝에 얻는
작은 떨림이라는 것을

겨울, 흰 눈은 세상을 고요히 덮었다
기와 위에 내려앉은 눈송이는
별빛처럼 반짝이며 사라졌다
마을 굴뚝마다 피어오르던 연기
장작불 곁에서 마주 앉아 나누던 이야기
그 속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평화가 있었다

바람은 차가웠으나
사람의 마음은 따뜻했다
그 온기는 내 삶의 겨울을 지날 때마다
언제나 등불이 되어 준다

이제 나는 멀리 떠나와
도시의 불빛 속을 헤매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언제나 고향이 숨 쉬고 있다

고향은 단순한 땅이 아니다
나를 길러낸 시간
흙과 바람과 별빛이 합쳐 이루어진
영원한 노래다

나는 믿는다
언젠가 그 길 위에 다시 설 때
낯익은 흙냄새와 함께
고향은 조용히 나를 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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