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앙코르 와트에 있었다

by 노준성

낯선 새벽
안개가 사원의 벽을 어루만질 때
내 안의 오래된 원망도
천천히 녹아 내렸다

누군가의 기대였고
누군가의 기억이었으며
누군가의 시선 속에 살아왔던 존재
그날, 이름 없는 여행자가 되었다

앙코르의 돌벽은
수 천 년의 상처를 품고도
울지 않았다
숭고한 이마에 손을 얹자
식어버린 마음에
따뜻한 온기가 감아온다

태양은 천천히
탑의 어깨를 비추며
어둠을 벗겨내고 있었다
바람이 계단 틈새를 지나
머리결을 스치며
낡은 기억들을 데리고 사라졌고
새벽빛은
물웅덩이에 반짝이며
눈 속에도 작은 등불을 띄웠다

잃어버린 것은 사랑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안식의 길을 참회의 눈물로 걸으며
내 안에 남아 있던
무거운 이름들을 내려놓았다

그날 나는
앙코르 와트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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