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DNA

by 노준성

비 한 줄기 그어놓고 간 저녁

창틀에 스민 젖은 흙내음 속에서

오래 묻혀 있던 씨앗 하나

가슴의 어둠을 더듬어 눈을 뜹니다


핏줄 따라 돌아온 먼 기억이

내 안의 토양을 다시 일구는 시간

배운 적 없는 대지의 언어로

적셔진 땅이 나를 부릅니다


어린 날의 들판은

내 맨발바닥을 먼저 읽었습니다

발목에 낮은 문장을 새기던 이슬과

접힌 하늘을 발밑에 풀어놓던 논물


아버지의 굽은 등은

깊게 갈린 한 줄 밭고랑이었습니다

침묵이 먼저 지나간 자리마다

계절은 천천히 몸을 묻었습니다


나는 그 곁을 구르던 이름 없는 풀씨

저녁이면 굴뚝 연기 끝을 따라

작은 집의 품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세월은 나를

유리와 콘크리의 숲에 옮겨 심었지만

비 오는 날이면 보이지 않는 뿌리 하나

어둠의 밑바닥을 긁어 물을 길어 올립니다


그제야 나는 알게 됩니다

내 안 어딘가, 아직 쟁기 닿지 않은

태초의 묵은 흙 한 뼘이 있어

고요히 숨을 고르며

다음 계절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월, 화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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