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한 줄기 그어놓고 간 저녁
창틀에 스민 젖은 흙내음 속에서
오래 묻혀 있던 씨앗 하나
가슴의 어둠을 더듬어 눈을 뜹니다
핏줄 따라 돌아온 먼 기억이
내 안의 토양을 다시 일구는 시간
배운 적 없는 대지의 언어로
적셔진 땅이 나를 부릅니다
어린 날의 들판은
내 맨발바닥을 먼저 읽었습니다
발목에 낮은 문장을 새기던 이슬과
접힌 하늘을 발밑에 풀어놓던 논물
아버지의 굽은 등은
깊게 갈린 한 줄 밭고랑이었습니다
침묵이 먼저 지나간 자리마다
계절은 천천히 몸을 묻었습니다
나는 그 곁을 구르던 이름 없는 풀씨
저녁이면 굴뚝 연기 끝을 따라
작은 집의 품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세월은 나를
유리와 콘크리의 숲에 옮겨 심었지만
비 오는 날이면 보이지 않는 뿌리 하나
어둠의 밑바닥을 긁어 물을 길어 올립니다
그제야 나는 알게 됩니다
내 안 어딘가, 아직 쟁기 닿지 않은
태초의 묵은 흙 한 뼘이 있어
고요히 숨을 고르며
다음 계절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