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 순 Dec 31. 2021

1. 오독 할테다

오독

어젯밤  늦게까지 읽었던  책의  저자가  아침까지도  눈 앞에 아른거렸다.  ‘모든  요일의  기록’의  저자다. 부제는  '날카로운  아이디어는  뭉툭한  일상에서  나온다.'이다.

요즘은  개인  에세이를  별로  읽지  않았다. 재미가  없으니까. 다  아는  이야기 같고  그날이  그날 같은  이야기 같아서다.  그런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건, 것도  내 돈 주고  산 것은 카피라이터인  그녀의  번쩍이는  재치를  엿보고  싶어서다.


이 책은  평범하면서  평범하지  않다. 별다를 것  없는  일상에서  카피 문구를   뽑아내듯  가끔  정제된 문장들이  있다. 일상을  묘사한  그  문장들이  그녀의  개성을  조각하고  조각된  개성은  또  '그녀'를  이룬다. 5톤 정도의  책을  읽었다는  그녀. 빛나는  20대 때?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인지  ‘시간과  존재’인지라는,  읽으라고  쓴 책이  아닌 책을  읽었고,  그랬음에도  읽지  못했으며  10년 뒤,   어느 날  수돗물처럼  좔좔  읽혔다가  또  10년 뒤  그  책의  한 줄도  읽지  못했다고  말하는  그녀의  독서이력이  부러웠다.


한 개인을  특징 지우는 평범함을  세밀하게  묘사한  문장들이  나를  매료시켰다. 궁극에  내가  내 손으로  쓰고  싶었던  문장들이다.  감각되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문장으로  옮기는  작업.


그녀는  모든 책 읽기는  ‘오독’이라고  말한다. 깊이 공감한다. 책은  자기 식대로  읽고  오독의  상태로  완성되는 것 같다. 같은  논리로  따지자면  세상에  오독  아닌 것이  없다. 어떤  시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가장 큰 오해가  이해’라고. 우리는 오해해  놓고  이해했다고  말하고  이해했다면서  오해한다. 웃픈 노릇이다. 이런 논리로  접근하면  세상의 모든 소리는 메아리가 없고 그런 세상은 참  공허하다.  되돌아 온 소리는 같은 소리가 아니라 미묘하게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렇게  생각하면  ‘왜?’라고  자기 입장만 고집 피울 일이  없어진다.


독서 명상을  해보기로  하자.  읽으면서  마음을  비우는  연습. 이  책의  저자는  읽고도  내용을  기억 못 한다고 했다. 담론처럼  커다란  덩어리, 뭉뚱그려진 이미지만  남는다고. 생각을  변화시킨  순간의  느낌만  남는단다. 그렇다면  그  책은  읽은 것인가  안 읽은 것인가?  그것의 답은 우리 몸에 있다. 몸이 기억한다.


 나 역시  그렇다. 바로  윗 문장이  생각 안 날 때도  있다.  한술 더 떠서 아예 의미없이 글자만 읽고 있을 때도 가끔 있다. 그러나  겁먹을  것까진  없다. 이런 류의  사람들을  위해  오래 전에 어떤  작가가  '문학의  건망증'이란  글을  썼다.  문장이  내  몸을  통과해서  빠져나가지만  그  문장이  내 몸을  통과하는 동안  나의  사고체계가  살짝  바뀐다는  사실 ,  스스로는  그  문장  때문인지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건  변화된  자신을 어느 날  마주하게  된다면  그  문장은  제 역할을 충분히 다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로  윗 문장도 잊어버리는  책이  페소아의  책이다.  읽으면서  ‘설마  이걸  읽으라고  쓴 책은  아니겠지? 이건  책이  아니라  페소아의  뇌를  좌르르  종이에  쏟아놓은 것만  같아. 뇌수가  흐르면서  만들어낸  무늬. 암호 같다. 외계인이 보내는  모스부호. 딱  그거다.’라고 생각했다.

대체로  이해하지  못하다가 어쩌다  한  문장이  망치가  되어  달려든다. 그  순간을  위해  나는  페소아의  문장을  읽는다. '불안의  책'  연초부터  읽던  책인데  아직도다.


그러고  보면  인생이라는 책도  마찬가지다. 대체로  이해할 수  없는  책처럼  재미없는  페이지가  수두룩하다. 두껍기는  따라 올  책이  없다.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뜯어  연결하는 대만도 일생이  걸린다. 그런  책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어쩌다  이해되는,  이해라고  생각되는   기쁨의  순간 때문이다. 그냥  읽거나  오독하거나  그러다  오독이라고  판명되는  순간  깨갱  찌그러진다. 생에  패대기를  당한  느낌이다.  이해한 척  뽐내다가  오독을  들킨  순간처럼  비참해진다. 그러니  처음부터  난  ‘오독 할테다.’ 선언을  해버리고  싶다.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는 순간  패배로부터  일정 부분 자유로워진다.


15여 년 전  누군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카피를  쓰면  참  잘  쓰겠어요." 그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카피라이터의  직업에  대해  무지할 때였다. 지금 생각하니  나에 대한 극찬이었구나  생각되어  고맙기  그지없다. 오독했다가  이제야  겨우  제대로  읽게 된 문장처럼 잠시  잠깐  나를  기쁨에  빠뜨렸다.


아직도  읽어야 할, 읽고  싶은  책이  많고  쓰고  싶은  문장도  많다. 나의  의식은  써야  대체로  명료해진다. 생각 중에 머무르는 의식은  여름  햇빛처럼  찬란하지만  막상  꺼내려고  보면  구리 쟁반처럼  광채가  없다. 놓친  고기가  대어인 것처럼. 그러니  생각의  실체를  보려면  적어야  한다. 언젠가는 쓸모 없어질  이 글들을  왜  적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적기를  멈출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  이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으니까. 읽고  쓰면서  내가  나를  위로한다.

‘잘  살았고, 잘  살고  있고, 잘  살 거야. 좋은  일이  다가오고  있고  행복해질거야. 벌어질  일은 벌어지게  되어 있고  해석만이  너의  운명을  바꿀 수  있지.’


이런  생각 없이  어떻게  재미없는 많은  시간을  견뎌낸단  말인가. 그러니  글을  읽고  쓰는 건  나의  생존 수단이다. 언젠가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면 한낱  글자들의  무덤이  되어버리겠지만  그때는  '나' 역시  없으니  노  프라블럼이다.


우리는  서로  이해를  오해의  형태로  받아들일  뿐이다. 이해하지만  오해의  상태로  놓아두기. 모든  진실은  밝혀져야만 할까? 진실은  하나가  아니고  관점만큼이나  많을 테니  진실을 알아낸다는 것이  넌센스 일수도  있다.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고  따듯하게  기다려 주기. 화내지  말고  마음으로  안아주기.  


오늘도  나는  오독을  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