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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순 Jan 07. 2022

2.물류창고

물류취급

    

우연히 이수명 시인의 '물류창고'가 내게 왔다. 북트럭에 있던 것을 꺼내 들었다. 시집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고 있다. 시는 최소의 단어로 많은 말을 한다. 숨어서 보여 주고 침묵으로 말하는 시의 언어를 조금씩 알아듣기 시작했다.


물류창고, 도시적인 느낌의 단어에 이미 정신무장을 하고 일단 한 번 주욱 읽었다. 경험적으로 안다. 시는 처음부터 내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는 것을. 최승자 시인의 시가 그랬고 천양희 시인의 시가 그랬고 허연 시인의 시가 그랬다. 몇 번의 눈이 마주쳐야 겨우 아는 체를 하고 눈인사를 한다.


치과를 가기 위해 가방을 챙기면서 시집을 넣었다. 한 번 주욱 읽었으나 아무런 언급도 주지 않던 그 불친절하고 불편한 시집을. 뭔가 시어들이 도시적인 냄새가 나고 익숙한데 그 단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만들어낸 의미는 안갯속처럼 희미했다. 이런 경우 내가 하는 말, 그럼 난 이 시집을 읽은 것인가 읽지 않은 것인가.


오랜만에 운전석에 앉으니 기분이 좋다. 아파트를 빠져나가서 우회전이 아니라 이번에는 좌회전이다. 대우 마트 앞의 벚꽃이 반쯤 피었다. 벚나무 아래 정류장은 꽤 낭만적이다. 하얗게 꽃잎 떨어지는 날 버스를 타지 않아도 하롱하롱 꽃잎이 흩나리는 저 정류장 밑에 오래 앉아있고 싶다.  마치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것처럼.


치과 근처에 차를 세웠다. 예전에 살던 동네다. 시계를 보니 예약 시간이 30분이나 남았다. 시집을 꺼내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차 안은 이래서 좋다. 음악을 들어도 책을 읽어도 전화를 하거나 받아도 전혀 방해받지 않는다. 이때 새롭게 물류창고를 만났다. 이미지가 제법 선명하게 떠올랐다. 되돌아가 시인의 말을 다시 읽었다.


" 그가 말했다. 물류창고로 사용해도 좋습니다."


물류창고라는 시가 1부에 무려 열 편이나 나온다. 일렬 번호도 없이 모두 제목이 물류창고다. 그중 첫 번째 물류창고의 첫 연이다.



“우리는 물류창고에서 만났지

창고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차려입고

느리고 섞이지 않는 말을 하느라

호흡을 다 써버렸지 “ <물류창고/ 이수명>



 

이 부분을 읽으면서 무표정한 사람들이 직함을 옷처럼 걸치고 컨테이너 박스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컨테이너 박스 속에는 많은 물건들이 있고 그 물건들 사이사이 서로 다른 직함을 입은 사람들이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느라 하루를 다 써버렸다. 저녁이면 지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사람들은 직사각형 컨테이너 박스 밖으로 비실비실 걸어 나왔다.

하루의 호흡을 그렇게 소비해 버리는 물류창고의 종사자는 창고에 쌓인 물류와 구분되지 않았다. 더 커다란 창고에서 왔다 갔다 하는 다른 종류의 물류. 소비재로 보였다.


중간쯤 연에는 이렇게 이어진다.      



“창고를 빠져나가기 전에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누군가 울기 시작한다

누군가 토하기 시작한다

누군가 서서

등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누군가 제자리에서 왔다 갔다 하고

몇 명은 그러한 누군가를 따라 하기 시작한다 “ <물류창고/이수명>     




창고는 물류창고 직원에게는 세상이다. 절벽에 서서 아무 이유 없이 울기 시작하는 그가 사라져 버린 하루들을 생각한다. 그의 머리는 하얗고 등은 굽었으며 구두의 뒤축은 다 닳아있다.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사내를 남루한 옷을 입은 사내가 등을 토닥거리는 풍경. 창고 밖 세상으로 나가기 전 누군가는 울고 , 토하고, 등을 두드리고 , 왔다 갔다 한다. 드디어 하루의 끝에 가서야 무표정하던 얼굴에 슬픔의 그림자가 번지고 말을 버리고 몸으로 소통을 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보내는 위로다.


그리고 절정에 이른다. 빅 브라더의 목소리가 낮게 깔린다.


"대화는 건물 밖에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창고를 떠나기 전 정숙을 떠올리고 잠잠해진다. 잠잠해지고 잠잠해져서 어느 순간 완전히 잠잠해지고 스위치가 나간다. 세상은 검은 천으로 덮인다.


이 시는 소리 없는 암흑이다. 죽은 시체들의 사회다. 영혼이 없이 물건들만 왔다 갔다 하는 물류창고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 사람들의 언어는 이곳에선 허용이 안되고 정숙해야 한다. 건물 밖에서 해야 한단다. 죽은 건지 살아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이 시집 전체가 이런 분위기로 흐른다. 시들의 말이 비로소 나를 곁눈질로 힐끔 쳐다본다. 어제는 그렇게 물류창고의 떠다니는 먼지처럼 여겨지던 시어들이 나긋나긋 말을 하고 춤을 춘다.


시를 읽다가 예약시간을 넘겼다. 데스크에서 전화가 왔다. "가고 있어요" 얼마나 걸리겠느냐고 물어서 "오 분 정도 걸려요" 대답했다.


치과는 정말 가기 싫다. 고깃덩어리처럼 누워서 입을 쩍 벌리고 악어새에게 이빨을 맡긴 악어처럼 누워있는 것도 싫지만 윙윙거리는 소리도 싫고 내 침을 썩션 하는 소리도 싫고 이빨을 아프게 쑤셔대는 바늘 같은 것의 촉감도 싫다. 스케일링하는 시기를 놓쳤더니 스케일링하는 손길이 좀 거칠게 느껴졌다. 속으로 되뇌었다. 창고를 빠져나오기 직전 사내처럼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었다. 물류창고를 생각했다. 간호사가 나를 물류 취급하는 느낌이 들었다. 치과 문을 밀고 나오면서 생각했다.

"이래서 치과에 오기 싫다고"


건널목을 건너고 성당을 지나 소방서, 그리고 우체국을 지났다. 도서관이 사라지고 도서관이 있던 자리에 관리사무소가 자리하고 있다. 도서관이 밀렸나 보다. 차를 타고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천천히 돌았다. 사실은 양지바른 4단지 홍매화를 보기 위해서였는데 홍매화는 못 보고 만개한 동백꽃을 보았다. 천변으로 벚꽃이 하얗게 피고 있었다. 벚나무 아래 차를 세우고 다시 시집을 꺼내 들었다.


물류창고!     


“p는 물류창고 한가운데 서 있다

새로운 물류를 맞이하려고 두 팔을 벌린다

그러나 잠시 후

밖에서 누가 부른다

p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 음성을 향해 간다

바닥에 쓸려 다니는 먼지를 따라간다 “ <물류창고/이수명>



두 가지 영상이 머릿속에서 돌아갔다. 산부인과 분만실과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사라졌던 새파랗게 젊었던 청년의 모습. 소리도 표정도 없는 이미지가 차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마지막 물류창고다.


" 그는 창고로 간다고 했다. 창고에 재고가 좀 남았나 살펴본다고 했다. 쓸모없는 일이다. 기록상으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물류창고/이수명>



쉼표도 없이 행갈이도 없이 독백처럼 길게 이어지다 마침표도 없이 끝나는 시다. 창고에 물류가 바닥나고 있다. 하물며 사라진 물류들의 기록도 없다. 머릿속으로 저출산 시대의 실현 가능성 없는 대책을 얘기하는 티브이 화면이 빠르게 지나갔다.


곧 벚꽃이 흐드러지겠지? 처음 맞이하는 봄처럼 즐겨야지. 어차피 우린 끝내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이 만우절이면 딱 좋겠다. 이생은 이 막으로 이루어져 있다지. 그 이 막은 " 생이 한 번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시작된다고 했다. 나의 이 막은 이미 시작되었다.



2019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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