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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순 Jan 10. 2022

3. 몸으로 쓰는 유서

모든 계절이 유서였다.

모든 계절이  유서라고 했다. ‘유서라는 단어에는 비장미가 느껴진다. 남겨진 글이나 남겨진 사람이나 남겨진 …… 어떤 것들은, 가을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뒷마당처럼 쓸쓸한 정서가 몰캉하다. ‘유서 특성상 지금은 부재중이고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슬픔과 상실의 허무, 비애 같은 잡힐  잡히지 않는 무거운 공기의 속에 떠도는 어떤 것일 것이다. 그래서 유서는 먼저  것들의 끝없는 메아리다.


‘불립문자’

작가를 위로하고 가르치는 것은 언제나 불립문자라고 했다. 그 불립문자로 쓰인 것들이 계절이고, 유서이고, 위로라고. 그러나 나의 감성은 작가의 감성을 따라가지 못했다. 계절과 유서가 나란히 아무런 연관성도 갖지 못한 채 액자 속에 묶인 초상화의 눈동자처럼 무표정하게 나를 응시했다. 어두운 밤 귀갓길에 나를 따라오던 그믐달처럼 해독 불가의 문장은 오랫동안 나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글 속의 문장을 중얼거리며 며칠을 보냈다. ‘살고 싶은 날에는 숲으로 간다’ 꽃은 제가 꽃인 줄도 모르고 신선하고, 풀은 풀인 줄도 모르고 생동하며, 나무는 나무인 줄도 모르고 자란다. 사람은 제일 고등 동물이면서 제일 고통받는 동물이다. 말을 다 하지 않고 언제나 남기는 사람과 그 남긴 말을 뒤늦게 완성하는 사람. 살고 싶은 날엔 숲으로 가는 사람과 살고 싶어서 걷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며, 같은 문자를 쓰는 한 종류의 사람이지 않을까.


높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본 어느 날, 내게도 유서가 희미하게 읽혔다. 유난히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순간에도 유서는 장엄하게 쓰여지고 있었다. 마침내 ‘ 모든 계절이 유서였다’라는 제목이 눈 속에 파묻힌 빨간 겨울 열매처럼 선명했다. 전류에 감전된 듯했다. 유서는 남겨진 말이다. 문자 이전에 우리는 말을 먼저 한다. 말은 의미이고 행동이고 삶이다. 그래서 유서는 반드시 문자일 필요가 없다. 숲은 숲의 언어로 유서를 쓰고, 나무는 나무의 언어로 유서를 쓰고 계절은 계절의 언어로 유서를 쓴다. 나는 나의 언어로 하루하루 유서를 쓰는 중이다. 나의 유서 역시 불립문자다.  


살고 싶은 날에는 숲으로 가자. 거기 쓰인 것들을 또박또박 읽으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자. 내가 사라져야 할 이유가 서른 가지가 넘는다 해도 숲에 가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할 이유를 삼백 개쯤은 쉼 없이 듣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숲의 생명력은 조용하지만 강철같다. 패배하지 않는다. 끝없이 이어진다. 모든 계절이 피로 쓴 유서라면 그 유서는 마음으로 읽어야겠지. 피의 언어는 불립문자라서 눈으로는 해독 불가. 오직 한번뿐인 것들은 몸으로 유서를 쓴다.      

살고 싶은 날에는 우리 모두 숲으로 가자. 가서 숲의 언어, 계절의 언어, 나무의 언어로 쓰인 유서를 읽자. 거기 쓰인 유서를 읽고 우리도 힘내서 일생에 걸친 길고 긴 유서를 쓰자.      




다시 한번 안리타 작가의 <모든 계절이 유서였다>라는 시집을 펼쳐 읽었다. 책 표지에 어떤 현란함도 없이 참 심플하다. 그래서 더 맘에 든다.  내가 어떻게 이 책을 만나게 되었는지. 가만히 되짚어 보니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유난히 심심하던 어느 날, 무작정 걷고 있다가 다리도 쉴 겸 해서 들른 곳이 천정까지 책꽂이로 가득 찬 도서관이었다. 그곳에서 서핑하듯 손가락으로 책등을 읽다가 멈춘 곳에서 만나 들춰본 책, 끝내는 바닥에 주저앉아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머리에 맴돌던 ‘유서’라는 말. 그 말이 나를 여기까지 인도했다.      


중요한 순간들은 ‘우연’의 옷을 입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러니 인생의 굽이굽이를 산책하듯 거닐어봐야지. 생의 갈피에서 우리가 무엇을 만날 지 어떻게 아는가. 끝날 때까진 그 어떤 누구도 아직 끝난 게 아니다. (22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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