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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순 Mar 14. 2022

15. 비닐우산

 상상하는 대로 움직여라

서울행 열차를 탔어야 할 시간에 책을 읽는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온통 상징과 비유로 범벅이 되어 있어 쉽게 읽어 나갈 수가 없다. 그러나 멈출 수도 없다. 역시 니체다. 짧은 문장에 많은 의미를 담아낸 아포리즘, 그러니까 깊은 체험적 진리가 간결하게 압축된 형식의 짧은 글이 자석처럼 자꾸 나를 끌어당긴다.


특히 벗과 이웃에 관한 글이 좋다. 아직까지 읽은 곳까지는 그렇다. 벗에게서 적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단어가 도발적이라, ‘뭐라고?’ 잠깐 멈칫했다. 벗 내부의 적으로 하여금 화살을 날아가게 하고 동경을 멈추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 예속되거나 존경하는 사람은 결코 벗이 될 수 없다. 고독한 사람은 심연이 많은 사람이고 심연에 가라앉지 않기 위해 그들은 벗이 필요하다. 벗은 심연에 가라앉는 것을 막아주는 코르크 마개다. 우정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은 여름 푸성귀처럼 무성해도 이처럼 뼈만 발라놓은 글은 처음이다.


이웃을 사랑하라. 가까운 이웃이 아니라 먼 이웃을 사랑하라. 이웃은 가까운 물리적 거리를 의미한다. 가까운 이웃을 사랑하면 무리를 이루고 무리를 이루면 좀 더 먼 누군가의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다. 곰곰이 내 지난 이력을 보니 반박할 말이 없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안에는 그들을 내 편으로 만들어 이익을 취하려는 생각이 숨어있다.


떠듬떠듬, 글자를 처음 깨친 아이처럼 글을 읽는다. 뼈대만 있는 글을 읽다 보면 생각은 뱉어내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이란 걸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오해를 통해 이해에 이르듯 생각을 자꾸 먹어서 누군가를 이해하는 먼 방법을 선택한다. 분노 속에는 자기 욕망이 똬리를 틀고 있다. 나를 버리고 나를 보면 알 수 있다. 명상을 통해 서서히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분노는 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요구하는 일차적이며 매우 거친 방법이다.


점심을 먹고 내과에 갔다. 기다리는 동안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었다. <나는 아직 서울이 괜찮습니다> '서울 살이'하는 나무와 하마를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그림도 예쁘고 내용은  예쁘다. 저자가 젊으니 생각도 젊다. 대기실 화면 위로  이름이 올라갔다. 아무 의미를 담지 않은  길동과  영자 사이에 끼어 위로 올라가는 내가 낯설다. 마치 다른 사람을 마주한 느낌이다. 이름  글자에서 글자를 보고 있는 ‘ 다른 ‘ 본다. '? 분명히 아는 사람인데 누구더라'  그만큼 낯설다. 이름 안에서 많은 감정들이 지나갔고  감정들은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나 내가 아닌 . 내가 기억하는 나의 합집합이 거기 있었다.  글자와  글자 사이에 끼어 글자 아닌 내가 자꾸만 올라갔다. 기억 속의 나는 분명 나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다. 지금의 나는 책을 보고 있고  이름이 다른 이름에 앞뒤로 결박당한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있다. 타자화  내가 거기 있었다.


이름이 호명되어 진찰실로 들어갔다. 젊은 의사는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역시 잘 생겼다. 의례적인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소리가 전혀 의례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이유는 상상하시라. 젊은 의사와 눈을 맞추며 손가락, 특히 새끼손가락의 통증과 새벽의 조조강직에 대해서 설명했다. 18년 과외선생님을 했으니.... 아 맞다. 하는 일이 뭐냐고 물어서 18년 동안 하루 7시간 이상 숫자를 썼다고 했다. 손가락에 문제가 생길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처음으로 직업병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소견은 퇴행성관절염이나 류머티즘 관절염이 의심되나 아직은 확진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란다. 삼일 치 퇴행성관절염 처방을 하고 낫지 않으면 정형외과를 가란다. 퇴행성관절염은 정형외과고 류마는 내과인데 증상이 악화되면 전문 류마내과를 찾아가라 했다.


예상했던 대로다. 삼일 치 약을 받아 거리로 나왔다. 비가 왔다. 집으로 가긴 싫다. 그러나 내겐 우산이 없다. 나온 김에 커피숍에서 책이나 봐야지 했는데 낭패다. 버스를 타고 도로 집으로 가려니 정거장이 너무 멀리 있다. 맞을 정도의 비는 아니다. 도로로 나섰다가 도로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그냥 비닐우산을 하나 사면되는데 이렇게 망설이는 내가 싫다. 비닐우산을 하나 사서 쓰고 하려던 일을 그냥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 갈등을 유발했다. 이유는 하나다. 집에는 하마네 집에서 가져온 비닐우산이 너무 너무   많다. 많은 비닐우산에 또 하나를 더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 째는 불필요한 곳에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습관이란 이렇게 질기다. 집으로 갈까 비를 맞을까 고민하다 궁색을 버렸다.


뚜벅뚜벅 펜시점을 향해 씩씩하게 걸었다. 농협 앞을 지날 때였다. 두툼한 겨울 코트를 입고 땅딸막한 할머니가 비를 맞으며 전단지를 돌리고 있었다. 나와 거리가 가까워지자 "받아주세요" 하며 내 앞으로 전단지 두 장을 내밀었다. 나는 몸을 비틀어 거부의 의사를 밝히고 그 자리를 외면했다. 몇 발자국 걷는 동안 속이 시끄러웠다. 비도 오는데 나야 그냥 받아 들고 가다가 어디 쓰레기통에 넣으면 그만인데 내 거절의 몸짓에 쩌억 금이 갔을 할머니의 마음을 생각했다. 합리적인 내 이성이 그 합리성을 내려놓았다. 내게 무슨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비를 맞으며 도로 돌아섰다. 할머니의 뒷모습이 비에 젖고 있었다. "저어 할머니 그거 저 주세요" 이것은 비 때문이다. 다분히 비 때문이다.


비닐우산을 샀다. 4000원이다. 탱탱한 투명 비닐 돔 위로 깨 볶는 소리를 내며 빗방울이 떨어졌다. 귀전에서 전원 교향곡이 울렸다. 아니 봄의 왈츠다. 유리그릇처럼 비닐우산은 투명해서 좋다. 시야를 확보해 주면서 비는 막아준다. 비야 내려라 이젠 얼마든지 걸어도 좋았다.


유명 커피숍을 그냥 지나쳤다. 스타벅스, 투 섬 플레이스 ...이 둘은 너무 자리가 빡빡하다. 옆 테이블이 나의 사적 공간을 보호해 주지 못할 것 같아 패스다. 누리는 공간이 아니라 주,정차장 같다. 나는 여유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오래도록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도 눈치를 주지 않는 곳, 빈자리가 많아 사적 공간이 넓게 확보된 곳, 창이 넓어 얼마든지 시선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곳, 그런 곳이어야 했다.


빗소리를 음악 삼아 오래 걸어도 좋겠다고 생각하며 걷는데 내가 찾던 커피숍이 나타났다. 일단 창이 넓다. 사람이 세 명이고 빈 테이블이 많다.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생각했다. 따듯하고 달달한 거! 이번엔 아메리카노는 아니다. 나를 대접하고 싶었다.


으레 나는 커피숍에 가면 메뉴판을 보지 않고 '아메리카노'를 외친다. 아메리카노 마니아라서가 아니라 누가 낼지 모르는 커피 값을 올리고 싶지 않아서다. 단체인 경우도 물론 아메리카노다. 이유는 같다. 단 다른 사람이야 뭘 시키든 상관없다.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가 근본 이유다. 그러나 내가 지불할 경우 반드시 외친다. "뭐든 원하는 대로 시켜요" 내가 사 줄 땐 좋은 걸 사주고 싶고 내가 얻어 마실 땐 아메리카노가 편하다. 그러니까 오늘은 마시고 싶은 걸로!


그래 봤자. 라떼다. 자리에 앉으면서 피식 웃음이 났다. 개인 조명이 있는 테이블에 같은 간격으로 여자 한 명과 남자 두 명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앉아 있었다. 가운데 남자는 노트북으로 뭔가를 작업 중이고 다른 남자의 귀에는 하얀 이어폰 줄이 매달려 있다. 여자의 테이블엔 두꺼운 책이 펼쳐져 있다. 작정하고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틀림없다. 마음이 놓였다. 내 집 거실처럼 편안했다.


라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읽고 있던 서울 이야기는 금방 끝이 났다. 천양희 시집 <새벽에 생각하다>를 펼쳤다. 손가락을 맘껏 사용할 수 없어 시를 읽기 시작했는데 그만 시 속에 풍덩 빠져버렸다. 최근 최승자 시인의 시집을 네 권이나 사버렸다. 반복해서 소리 내어 읽다 보면 두꺼운 소설을 끝냈을 때만큼의 감동이 있다. 시집은 얇지만 절대 내용은 얕지 않다. 그걸 이렇게나 늦게 알다니.....


'50년'이란 시가 있다. 50년은 다리가 놓이기에도 어린이가 어른이 되기에도, 어른이 죽어 사라지기에도, 안락했던 의자가 삐걱대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여기에 나는 한 줄을 얹는다. 시에 문외한이 어떤 여자가 시에 눈을 뜨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50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무엇을 하기에도 충분한 시간. 건강하던 손가락이 시위를 하기에도, 무엇이나 잘 소화하던 강철 같은 위가 고장이 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시는 확장이 가능해서 얼마든지. 부풀릴 수 있다. 핵심만 짚어낸다면 소설 열 권으로도 늘릴 수 있다. 독자의 몫이다.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너의 이야기인지 나의 이야기인지. 꽃 이야기인지 사람 이야기인지. 그래서 매력 있다. 모호함은 늘 호기심과 상상력을 동반하니까.


주변이 어두워 졌다. 비닐우산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젖은 공기에서 흙냄새가 났다. 타닥타닥 돔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문학의 건망증'을 들었다. 오디오 북이다. 행복한 시간들이 툭툭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걷다 보니 벌써 집 앞이다. 일상에는 즐거운 일들이 숨어있다. 발견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소확행의 요소들은 발견하지 못하면 그대로 소멸해 버린다. 이미 늦은 그때 우리는 후회하며 서둘러 일상을 뒤적거린다.



상상하는 대로 움직여라. 그리고 발견하라.


2019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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