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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y Jan 31. 2024

4화. 같이 그네 타는 사이

in Iceland

새로운 세계들

인간은 각자가 하나의 우주야.
우리는 그 우주가 얼마나 큰지, 얼마나 깊은지 다 알 기 힘들지.
하지만, 우주를 대할 때
경건한 마음, 소중히 받아들이는데 엄숙한
그 마음이면 충분해.


“누구니? 누구랑 그렇게 한참 이야기를 했어?”


“친구!  이 동네에 살아. 내게 가족 이야기를 해줬어. 근데 저 아이의 엄마가 아프데. 마음이 아파”

 

어떻게 만난 지 몇 분만에 금세 친구가 될 수 있지?

아이들의 세계는 신기할 따름이다.  

 

아이슬란드의 많은 부분을 보고 싶은 마음에 한 곳에 며칠 씩 머물러 있는 경우는 없었다. 물론, 특별히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는 곳에서는 계획을 바꾸어 하루 더 머물며, 느긋하게 풍경을 감상하며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놀라운 것은 꾸준히 이동하는 이 여행에서도 가는 곳마다 그녀는 친구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4개월 전쯤 암 투병 중인 엄마의 요양을 위해서 고향인폴란드를 떠나 외할아버지가 계시는 아이슬란드 작은 시골 동네로 이사 오게 된 그녀보다 1살 많은 소년.


젊은 시절 촉망받는 승마 선수였지만, 다리에 부상을 입고 선수 생활을 접은 뒤  그림 같은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언덕위에 자리 잡은 말 농장을 겸한 게스트 하우스의 주인 된 청교도스러운 인상을 풍기는 아저씨.

어쩌다 보니 아이슬란드에 가족과 여행을 왔지만 어른들은 왜 이토록 뜨거운 온천을 좋아하며 앉아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던 프랑스에서온 동갑내기 소년.


아이슬란드의 예측 불가능한, 그렇지만 선물같은 여름에 대해서, 그녀와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겨울의 신비로운 오로라에 대해서, 그리고 아이슬란드의 말과, 양과, 새와 꽃에 대해서, 멀리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일렁이는 바다를 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해주던 간결한 웃음이 매력적이었던 아이슬란드의 아가씨.




백야로 인해 시간개념을 상실한 모녀가 끼니를 놓쳐 곯은 배를 부여잡고 뛰쳐 들어간 동네의 작은 피자가게에서 가게문을 닫다 말고 뜨끈한 피자 한판을 뚝딱 만들어준 주인 아저씨.


기계 작동법을 몰라 실수로 차 바퀴의 바람을 완전히 빼 한 쪽으로 기운 자동차를 빗속에서 망연자실 쳐다보던 우리에게 혜성처럼 나타나 바퀴에 바람을 넣어주며,걱정말고 하늘에 뜬 무지개나 보라며 우리를 웃게 해 준 슈퍼맨 아저씨.



이들 모두, 그녀가 여행 중 만난 친구들이었다.


그녀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고,

그들은 그녀의 모험을 응원했다.


그녀는 한 나라를 여행 중이었지만,

수 많은 우주를  만났다.


신의 뜻


레이캬비크의 하들(할)그림스키르캬 교회 앞에는 그네가 있다.

그네들은 독특하게 큰 원을 그리며 설치되어 있다.


아이들이 그네를 타고 발을 구르면 그들 각자의 발끝이한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서 맞 닿는다.

서로 모르는 아이들이 각자 그네를 타고, 동시에 발을 구르자고 합심하며 구령을 한다.


발이 닿는 순간 꺄르르르 소리를 지르며 환호한다.

리듬에 맞춰 그네를 잘 타야만 그 다음번에도 발이 정확히 모두 맞닿을 수 있다.  


한 아이가 박자를 놓치니, 괜찮다고 격려해 주며 모두 다시 발을 가지런히 모아 오를 채비를 한다.


날아오른다.

타령 같기도 하고, 노래 같기도 한 추임새를 넣어가며 마치 하늘로 곧 닿을 것처럼.



교회는 한눈에 봐도 아이슬란드의 대표 절경인 주상 절리 모습 그대로를 재현해 놓은 듯 보였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그 모양이 신의 은총에 닿고자 하는 인간의 강렬한 염원인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날카롭게 보이는 그것이 생의 고통에서 울부짖는 인간의외침 같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이 교회를 올려다보고 감탄하며 열심히 사진을 찍어댄다.  

하지만, 나는 서로 발을 맞추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며 그네를 타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이들의 저 보잘것없고, 사소한 작은 호흡들이 교회가주는 웅장함 보다 왜 훨씬 더 커 보이는 걸까? 

왜 더 경건해 보이기까지 하는 걸까?


그녀에게 그네를 그만 타고 가자고 재촉하지 않는다.


어쩌면 신의 은총이 깃들어 있을 교회를 둘러보는 일 보다는,

이토록 넓은 세상에서 기어이 만나 함께 그네를 타는 저들의 만남이야말로 신의 뜻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나(신)를 향하지 말고, 너희 서로를 향하라는 신의 뜻이 아닐까?

 

아이들은 헤어지며 교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내 서로에게 축복의 말을 건네며 작별인사를 한다.

마치 곧 다시 볼 것처럼, 산뜻한 안녕을 한다.


“엄마, 저 곱슬머리 여자 아이는 텍사스에서 왔어. 아빠랑 그리고 얼마 전에 생긴 새엄마랑 함께 여행 중이래. 나한테만 비밀인데, 아빠랑 둘이 있는 게 더 편하다고 했어. 내가 엄마랑 둘이 여행 중 이라니깐 자기도 언젠가는 친 엄마랑 그렇게 할 거래. 우리가 멋져 보인다고 했어.”  


그녀에게 묻는다.

 잠깐 만나도 다 친구가 될 수 있는 거니?
친구란 뭐야?


그녀가 대답한다.

질문이 어려운데!?
글쎄......
같이 발맞춰서 그네 타는 사이?



 나는 생각한다.

' 같이 발맞추어서....'

서로 속도를 맞추고,
함께 리듬을 만들어 나가는 것...
그렇지 그게  친구 맞네!


누가 내게 손수건 한 장 던져주리오
내 작은 가슴에 얹어주리오
누가 내게 탈춤의 장단을 쳐주리오
그 장단에 춤추게 하리오

<시인의 마을, 정태춘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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