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일은 계속 오고.
40대는 인생의 파도가 신나게 몰아치는 시기일까. 하나의 산을 넘으면 또 하나의 산이 몰려오는 것만 같다. 근데 또 나만 오는 거 같진 않단 말이지. 그래서 내 불행을 자랑하기엔 모두들 불행해서 마음이 좋지 않다.
사람들과 수다를 떨다보면 불행 배틀이 되기 쉽다. 힘든 건 끝이 없다. 그리고 내 힘든게 가장 와닿는다. 그지같은 체력. 말을 들어주지 않는 몸. 어딘가 고장난 몸. 내 맘 같지 않은 사람. 남편 자식 부모 같은 가족. 상사 부하 동료. 친구. 돈 문제. 내 마음 문제. 세상 문제.
내 몫도 힘들고. 남의 몫 역시 만만치 않다. 세상 걱정에 시름하고. 내 인생에 시름하고. 남의 인생을 걱정한다. 다정이 병인듯하여 잠 못드는 사람이다. 그래서 애초부터 거리조절에 실패가 잦다. 좋아하면 그것을. 그 사람을. 내 몸같이 여긴다. 환경이 나에게 힘든 건 나도 책임이 커. 회사가 이런건 내 태도 문제도 있어. 가족이 이럴 때 내가 좀 더 잘 해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 내 몸이 이런건 타고난게 아니라 내가 뭔가 잘못하지 않을까?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탱커처럼 광역 어그로를 몸으로 다 받는다. 그릇도 작으면서. 금방 넘쳐 버리면서. 부처님도 아닌데. 상대에 대해선. 이해해버리고 만다. 그럴수도 있지. 그럴만하지. 성녀님 같은 그 이해력이 왜 스스로에게 잘 통하지 않을까. 가시같은 작은 비판의 화살 하나가 나에게 꽂힐 땐 왜이렇게 크고 강력해질까. 안그래도 주위의 온갖 것들을 내 몸에 붙여서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처럼 과녁이 거대해졌는데. 양궁의 나라의 인간 답게 왜 10점씩 팍팍 타격 받을까.
문제는 역시 거리조절이다. 이것은 감정이입을 잘하기 때문일까. 어떤 망한 영화도 내가 보면 그럴싸해 보인다. 눈물 흘리고 공감해 버리기 일쑤다. 친구들이 나에겐 영화 재미있는지 물어보지 말라고 했었다. 어떤 영화도 보다 보면 인물이 사연이 있고 그 아주 작은 공감요소에도 공감을 해버리고 나름의 의미를 찾곤 하니까. 결은 다르지만 요새 착즙이라고 칭하는 말이 비슷한 결일 듯 하다.
친구가 인생의 파도를 나보다 심하게 타던 때. 자기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런 일이 오면 이렇게 생각한다고. “바람이 부는구나" 한참 힘든게 지나가고 또 다른 일은 금방 터진다. 그러면 또 이렇게 생각한다고 “바람이 또 부는구나.” 자주 태풍도 불고 높새바람도 불고 회오리 바람도 분다. 그렇지만 바람은 지나가니까. 정신 없이 휘말리면서 바람이 지나간 후의 고요함을 그리워한다. 바람이 지나가도 또 불겠지. 하지만 지나가긴 하니까. 이거 그거잖아 그거. 새옹지마잖아 새옹지마. 노인처럼 인생의 현명함을 배우는가. 일정 부분의 포기를 알아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