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오늘도 내 쓸모를 증명하고 있을까

강신주의 『쓸모를 증명하려 애쓰지 마라』 강의를 보고 –

by 규규


나는 쓸모있는 사람일까? 인간의 쓸모는 누가 정하는가
강신주


요즘 스스로에게 자주 묻는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애쓰며 살아왔을까?

미국에 근무하러 와서도,
낯선 환경과 언어, 새로운 문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내 쓸모를 증명하며 살았다.

'나는 이 팀에 꼭 필요한 사람이다'
'내가 없으면 이 일이 안 굴러간다'

그렇게 애쓰며 살아온 덕분에,
결국 이 팀에서 더 오래 함께할 수 있는 기회와 큰 보상을 얻었다.
주어진 자리에 감사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그래서 나는 행복한가?”


철학자 강신주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쓸모 과잉 시대’ 라고 표현했다.

회사는 끊임없이 묻는다.
“당신은 우리에게 어떤 쓸모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질문은 회사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사회에서도, 관계 속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비슷한 물음들이 따라다닌다.

'이 사람은 내게 어떤 도움이 되는가'
'저 사람은 이 관계에 어떤 가치를 더할 수 있는가'

사실, 이렇게 쓸모를 증명하려는 마음 자체는
어쩌면 아주 본능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뭐 해먹고 살지?"
이 고민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이니까.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내가 어떤 역할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건
결국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쓸모를 증명해야만
자리도, 관계도,
내 삶의 안전망도 지켜낼 수 있는 시대.
그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다.


그런데 문득, 교회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하나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이었다.
그 사랑이 참 고맙고,
그 은혜가 너무 커서
자연스럽게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게 됐다.

내가 가진 게 특별한 것도 아니지만,
내게 주어진 작은 역할 하나에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믿음이 있으니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나의 몫을 감당했다.

그런 시간들이 쌓이면서
돌아보면 오히려 내가 더 많은 은혜를 누리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시간들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함께 섬기면서,
자연스럽게 주변도 많이 보게 됐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자기 몫을 감당하는 분들,
결과보다 과정의 진심을 더 소중히 여기는 분들.
그런 분들을 보며 참 많이 배우고,
신앙의 본질도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런데 가끔은,
누군가 열심히 했지만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그 과정의 진심보다는
눈에 보이는 결과로 기억되는 모습도 보게 된다.

누가 탓하거나 평가하는 건 아니지만,
좋은 결과는 자연스레 더 오래 기억되고,
조금 아쉬운 결과는
그만큼 덜 주목받는 흐름.

신앙이란 본래
조건 없는 사랑을 배우고,
서로의 진심을 귀하게 여기는 자리인데,
우리도 모르는 사이
결과 중심의 시선이
조금씩 스며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시느니라." (사무엘상 16:7)



이런 분위기는
비단 교회만의 일은 아니다.

가정에서도,
누군가는 경제적으로,
누군가는 돌봄과 효도라는 이름으로
각자의 역할을 기대받는다.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서운함이 쌓이고,
그 서운함이 관계의 거리로 이어지는 경험들.

사회에서도 관계를 맺을 때
‘이 관계가 내게 어떤 도움이 되는가’를 먼저 따지는 일이
이제는 너무 자연스러워졌다.

서로의 쓸모를 확인하고,
그 쓸모가 흐려지면
관계도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모습들.

결국,
쓸모를 증명해야만 자리도, 관계도, 마음 붙일 곳도 지켜낼 수 있는 시대.
그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다.


장자와 혜시가 나눈 유명한 대화가 있다.
혜시가 말했다.
“그대의 말은 쓸모가 없네.”

장자는 이렇게 답한다.
“쓸모없음이야말로 진짜 쓸모라는 걸 아는가?”

혜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장자는 큰 나무 하나를 예로 들었다.

“사람들이 그 나무를 보고 말하네.
‘쓸모가 없다.’
목재로 쓰기엔 뒤틀렸고,
열매도 못 맺으니 아무도 관심 갖지 않네.
그래서 그 나무는 잘려나가지 않고
오래도록 그 자리에서 그늘이 되고, 쉼이 되고,
온갖 새와 짐승들이 모여드는 숲이 되었지.

그 나무가 쓸모가 없었기에
오히려 가장 크고 깊은 쓸모를 가진 셈이네.”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눈에 유용해 보이는 것만 쓸모가 되는 게 아니네.
보기에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이
오히려 더 크고 넉넉한 쓸모가 되는 법이지.”

세상은 우리에게 끝없이 묻는다.
“너는 어떤 쓸모가 있느냐?”

하지만,
장자는 우리에게 되묻는다.
“꼭 쓸모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시간과 존재들이
사실은 가장 깊은 쉼과 위로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가?”

아주 넓은 땅도
사람이 실제 발 딛고 서는 땅은 손바닥만큼 작다.
그런데 발 디딜 땅만 남기고
나머지 땅을 몽땅 파헤쳐버린다면,
그 땅은 정말 쓸모가 남아 있을까?

장자는 말한다.
“쓸모없음이야말로
진짜 쓸모가 되는 일이네.”



강신주는 또 말했다.

“삶에서 진짜 중요한 가치는
가성비로 따질 수 없습니다.”

사랑, 우정, 믿음 같은 것들은
투자 대비 성과로 계산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도,
우리가 유용해서가 아니라
그냥 사랑하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랑을 받은 내가,
사람을 쓸모로 평가하는 건
결국 사랑을 놓치는 일이다.


그래서 내가 선택하고 싶은 삶도
쓸모를 증명하기 위한 삶이 아니라,
사랑과 믿음 위에 놓인 삶이다.

오래전부터 꾸준히 재테크를 공부하고 투자를 해오고 있다.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쓸모가 아닌,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을 선택할 자유도
조금은 넓어지니까.

내가 원하는 삶은
더 많이 벌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는 삶이 아니라,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를
정말 소중한 사람들과,
내가 가치 있다고 믿는 일에
기쁘게 쓸 수 있는 삶이다.

그리고 그런 자유가 내게 허락되길 바라며,
돈이라는 도구를 준비하는 중이다.

그리고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도전할 수 있는 기회 자체도 달라진다.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도
조금 더 여유로워질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결국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가능한 일이다.
내가 가진 것,
내가 쌓아온 작은 기반조차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 위에 세워진 것이니까.

내 삶의 방향과 선택이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가치 위에 놓이길 바란다.


강신주는 묻는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도,
내 곁을 떠나지 않을 사람이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가족은 망설임 없이 떠올랐지만,
그 외에는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몸이 아파서
아무 일도 못 하게 되고,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일상조차 버거운 날들이 이어진다면.
혹은,
모두가 각자 삶을 꾸리느라 바쁜 사이
오랫동안 혼자가 되는 시간이 온다면.
그때도 곁에 남아줄 사람이 있을까.

장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땅은
발 크기만큼 아주 작다.

그런데 쓸모라는 이름으로
발 디딜 땅을 제외한 나머지를 전부 파내고 황천까지 뚫어버리면,
결국 남은 땅조차 쓸모를 잃고 만다.

나는 혹시
내가 가진 모든 관계와 자리에서
스스로 쓸모를 증명하려고 애쓰다가,
쓸모를 잃은 순간
발 디딜 곳마저 사라지는 건 아닐까.

그건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쓸모가 아닌 존재 자체로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지,
그런 나를 품어줄 관계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묻는 질문이었다.

쓸모가 사라져도,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순간에도
그저 곁에 있어줄 사람이 있다는 건
참 귀하고, 어쩌면 기적 같은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런 사랑을 받았으니,
나도 누군가를 바라볼 때
쓸모 때문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받은 사랑을 흘려보내는 사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순간에도
그저 곁에 있어줄 수 있는 사람.

완벽한 자유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내가 맺는 관계만큼은
쓸모가 아닌 사랑이 흐르는 자리로
조금씩 만들어 가고 싶다.

쓸모를 증명하려 애쓰지 마라.
나는, 그리고 우리는
쓸모 없어도 이미 충분히 소중한 사람들이다.

쓸모 없어도 괜찮다.

아니, 쓸모와 상관없이 소중한 존재라는 걸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셨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나를

하나님이 기쁘게 바라보신다는 사실을

끝까지 기억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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