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선과 악은 목적과 수단을 두고서 다른 방식을 고수해왔다. 지난 수 세기 동안의 싸움이 그것을 증명한다. 한 때는 그 방식의 기준이란 것이 상당히 선명하고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사회는 발전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품었고, 그 안에는 선과 악의 구분을 흐릿하게 만드는 이들 또한 있었다. 악은 제 모습을 사회에 맞춰 변화시켰고, 보다 치밀하고 보다 불명확하게 변했다. 선은 악의 태도 변화에 곤란해한다. 악은 끝이 없지만, 선은 한계가 있다. 보다 명확하게 말을 바꾸어보자면, 누군가를 해치는 것에는 제약이 없지만 누군가를 지키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결국에 보호해야 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 ‘보호’와 ‘선’의 개념이 가진 명확한 한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한계는 법으로 명시된다.
맷 그레이버는 CIA 출신이다. 그의 생각과 행동양식은 ‘군인’과 비슷하다. 그들의 목적은 ‘질서’다. 질서를 위한 통제는 그 수단의 위험성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이 충족해야 하는 제 1의 목표는 그것, ‘구조의 유지’다.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수단의 사용을 망설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최선의 정의는 ‘선제공격’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절차보다 결과를 더 중요시 여기는 이런 생각은 필연적으로 충돌을 만들어낸다.
케이트 메이서는 FBI 출신 요원이다. 그녀는 영화에서 '경찰'처럼 등장한다. 그들의 목표는 법의 심판을 받게끔 범죄자를 색출하고 잡아내는 것이다. ‘악당을 잡는 것’이라는 대명제에는 맷과 케이트 모두 동의했겠지만, 그것을 이루는 방법은 판이하게 달랐다. 케이트와 그녀의 동료는 법을 준수한다. 그것이 범인을 색출해 내는 것에 오히려 불편한 일이 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어쩔 수 없는 그들의 한계는 바로 이런 것이다. 누군가에게 법을 적용하기 위해서 법의 집행자가 되는 그들이 제일 먼저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사회의 기능을 신뢰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사회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경찰이 존재하고, 국가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 군인이 존재한다. 이는 케이트와 동료의 대화를 통해서 잘 묘사되는데, 맷이 케이트를 영입하려 했던 곳에서 케이트와 동료는 수칙을 잘 따랐는지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한다. 그들은 보호라는 기치 아래에서 절차가 우선이다. 절차가 정당해야 '올바른 일'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그 어느 집단에도 소속되지 않은 한 사람, 알레한드로 길릭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개인적인 복수심에서 출발한 인물이다. 가족의 복수를 위해서 칼을 갈고 있는 개인이다. 맷 그레이버는 그 사실을 알고, 그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그는 그저 사냥개일 뿐이니, 적당히 목줄을 쥐고 있다가 때가 되어 풀어주면 끝날 일이었다. 맷 그레이버는 알레한드로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영화에서 알레한드로 길릭이 맷 그레이버의 예상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복수자에 어울리는 판만 있으면 상관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는 완벽하게 그의 생각대로 작용했고, 정확하게 사냥감을 사냥했다. 그 덕분에 맷 그레이버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주인공인 케이트 메이서에게 본인과 작전을 결정한 윗사람들의 생각을 자신 있게 이야기해줄 수 있었다.
부패한 경찰인 실비오는 아들에게는 자상한 아버지다. 다만, 생활을 위해 카르텔과 타협하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가 아들에게 단호하게 말하는 단 한 번의 장면은 어린 아들이 그가 밥을 먹고 있는 동안에 총에 손을 대보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는 본인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본인의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악마와 손을 잡아야만 했다고 그는 믿었다. 때문에 자식이 총에 손을 대는 것에 단호하게 화를 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통제할 수 있는 악’을 배양하는 것이 ‘올바른 행동’일까? 만약에, 그 행동을 통해서 통계 자료에 등장하는 사망률이 줄어들고 사건·사고율이 줄어들게 된다면 말이다. 어차피 ‘악의 절멸’이란 요원한 일이니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현실적인 수준에서 생각해봐야 하는 최선의 방책인가? 영화 ‘시카리오’는 바로 그 부분에서 물음을 던진다. 맷 그레이버는 본인이 행하는 행동이 ‘선한 행동’ 혹은 ‘올바른 행동’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는 ‘질서’를 지킬 뿐이다. 새로 바뀐 조직이 여러 가지 트러블을 일으키니 제압하는 것일 뿐, 결과적으로 그들이 지구 상에서 사라질 수 없다는 것쯤은 훤하게 알고 있다. 그는 현장에서 구르고 구른 인물이다. 그가 현장에서 이런저런 사건들을 접하면서 변하게 된 것인지 원래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인물인지는 영화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맷은 정작 훌륭한 스펙을 갖고 있는 케이트의 동료에 대해 ‘변호사는 필요 없다’는 말로 일축한다. 아마 그의 입장에서 불법적인 일을 행할 때, 가장 걸리는 것은 그것이 불법이라는 이유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일 테니 말이다. 웃기게도 영화에서 변호사는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고, 검사는 그의 복수를 위해 절차를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총은 물리적인 수단이자 강력하고, 폭력적인 수단이다. 이 영화에서는 특히 그러한 성질이 잘 활용되었다. 영화 속 인물들의 총기 사용 여부와 그것을 사용하는 상황에서 ‘폭력적인 수단’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연출이 흥미로웠다. 개개인이 가진 행동에 대한 판단의 여부가 그 사소한 행동들을 통해 설명이 되었다. 영화는 크게 ‘보호’와 ‘단죄’의 형태로 표현되는 ‘정의’에 ‘수단’이 활용되는 방식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맷은 이 모든 일에는 윗선의 개입이 있다고 말한다. 수단 사용을 정당화하며, 질서를 바로 잡으려고 하는 이들이 정작 영화 속에서 등장하지 않는 ‘윗선’이라는 표현으로 설명된다는 것은 결국에 케이트가 불법적으로 폭력을 집행한 알레한드로에게 총을 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고 생각한다. 소요를 바라지 않는 윗선은 케이트의 내부고발 또한 일종의 ‘소요’로 볼 여지가 있으니 말이다. 폭력을 끝내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는 것 또한 그녀의 입장에서는 모순되는 상황이었을 것이고, 구조를 바꾸기 위한 내부 고발 또한 여의치 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그녀는 모르지 않았다.
수단이 정당화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의 목적일까? 아니면 결과일까?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시카리오: 암살자들의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