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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derer Apr 04. 2017

네 잘못이 아니야

영화 '굿 윌 헌팅'

 나는 이런 영화들을 좋아한다. 괜히 현재와 비교해서 그 시절의 영화들이 더 좋다던가 하는 말이 아니다. 덜 선명한 화면이나, 고전적인 배경음악들, 영화가 말하는 주제들이 좋다. '죽은 시인들의 사회', '라이언 일병 구하기', '쇼생크 탈출', '포레스트 검프', '사랑의 블랙홀', '필라델피아', '비포 선라이즈'까지. 말해보면 더 있지만, 이런 느낌의 영화들을 아낀다. '굿 윌 헌팅'은 그중에서도 특별한 영화다.

 인생에 영향을 주는 다양한 영화들이 있지만, 이 영화가 빛나는 이유는 그런 것이다. 불완전하고 불안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에는 아주 자신만만하게 나 스스로를 특별하게 여기고 살았다. 이 세상이 당연하게 내 중심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중심에서 떨어져 있어도 한참은 떨어져 있구나 하고 깨닫게 된 것은, 아주 사소한 실패들이었다. 그 실패의 연속이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불신하게 만들었다. 능력에 대한 의심은 필요했다. 실제로 뭘 잘 할 줄 아는지 알기 위해서는 미끄러지고 무너져봐야 아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능력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찾아오는 때가 있다. 그런 순간을 벗어나는 것은 꽤나 어려웠다. 자기혐오는 늪처럼 우울감으로 나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무너뜨렸다.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해야 할 일들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는데, 한번 흔들리기 시작하니까 불안이 가시질 않았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기 전에, 간신히 나를 붙잡은 것은 '내가 굳이 나를 싫어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우울감을 떨쳐낸 지금도 여전히 스스로에 대한 불신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나를 무너뜨릴 정도로 휘몰아치지는 못한다. 내가 생각한 비결은 바로 저 생각이었다. 그동안 나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자존심은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었다. 자존심은 한껏 자랑하기 위해서 쓰이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지 말아야 할 아주 기본적인 것들을 지켜주는 데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간단한 사실이지만, 이걸 모르는 것은 비단 내가 많은 것을 몰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여기 윌 헌팅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이 영화에서 특히 좋았던 것은 '상처'를 다루는 방식과 태도였다. 솔직하게 서로가 서로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공유하는 과정들이 진솔하게 느껴졌다. 윌과 숀의 첫 만남은 특히 그랬다. 서로 어떤 사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가 없으니 보다 예민하게 반응한 것도 충분히 그럴만한 일이었다. 본인을 온전히 타인에게 내보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나 큼직큼직한 상처가 많을수록 그렇다. 보통 이런 영화들을 보면, 주인공은 어떻게든 본인을 숨기려 애를 쓴다. 견고한 요새 안에서 관계를 끊고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윌은 달랐다. 한편으로는 본인의 천재성을 드러내고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또다시 누군가에게 상처받는 일이 두려워 스스로를 숨기는 사람이었다.

 술집에서 시비가 붙어서 경제 지식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던 중에, 윌은 상대에게 책에서 본 것을 인용할 줄만 알지 본인 것은 없다고 쏘아붙인다. 그 질문에 상대는 제대로 된 답변을 해주지 못한다. 재밌게도 똑같은 질문을 숀이 윌에게 하는 순간에 윌도 마찬가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책을 통해서 봤던 모든 것들을 기억해서 지식을 자랑하는 일 말고, 정작 그 자신만의 경험이 있느냐는 물음에 그는 아무런 답을 할 수 없었다. 지식과 경험 사이의 간극에서 숀은 윌의 실체를 발견한다. 또다시 상처받을까 두려워서 어떤 관계도 진전시키지 못하고, 익숙한 환경 속에서만 살아가고 있는 그를 발견한다.

 램보 교수는 끊임없이 윌에게 기회를 주려고 노력한다. 대단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니, 마땅히 그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그 재능을 발견한 그의 일이라 생각했다. 그에 반해 숀은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일을 선택하든 그의 선택인 만큼, 그것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은 관점의 차이였던 것이다. 윌을 두고서 세기의 재능을 가진 천재라 보거나, 상처 많은 어린아이로 보는 행동은 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사는 문제에 대한 해답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쥐고 있을 때도 있다. 다만, 문제의 풀이는 각자 다 들고 있는 경우가 많다. 고민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긴 하지만, 고민들에 대한 답은 이미 들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그랬다. 고민을 이야기하는 순간들은 결국, 스스로 확신을 얻기 위한 시간들이었다. 타인과의 비교는 자기혐오로 빠지는 지름길이다. 자존심이 없다면, 자기혐오의 순간들을 쉽게 빠져나가지 못한다. '스스로의 품위'를 지키는 데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필요하다. 신뢰는 연습이다. 어느 한 시점의 결과로 '신뢰'라는 등급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꾸준히 솔직해지려는 노력이 신뢰다.

 숀과 윌은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솔직하게, 서로가 서로에게 느꼈던 것을 이야기했다. 관계를 치유하는 힘은 그런 사소한 과정들 하나하나에 있었다. 관계를 풀어나가는 일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머리에서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그 해법은 사람마다 다양하다. 해법에 따른 행동도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부분은 동일하게 작동한다. 숀이 어떤 특별한 상담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관계가 호전된 것이 아니다. 숀은 그저 윌에게 솔직하게 대했을 뿐이었다. 그의 말을 잘 들어주고, 좋아하는 것을 물어봐주고, 스스로가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보게끔 행동했다.

 상처 없는 사람들은 없다. 상처 없는 관계 또한 없다. 다만,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방법은 있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굿 윌 헌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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