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은 언제나 야비하고 치사한 방식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언제나 독의 피해자일 뿐, 독을 무기로 사용하는 주인공은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독’이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사전적인 정의에서 그 이유를 일부 유추해볼 수 있다. 사전에서 ‘독(毒)’을 검색해보면 ‘건강이나 생명에 해가 되는 성분’이라고 나온다. 만약에 정의의 사도로 나오는 주인공이 이를 사용해서 악당을 공격한다면 주인공의 행동을 판단하는 것에 있어서 어려움이 생긴다. 생명에 위해를 가하는 행동을 두고서 그것이 올바른지 그른지 쉽게 판단할 수는 없으니까. 때문에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 만화나 게임, 영화들에 나오는 선악구조는 그런 복잡한 상상을 배제한다. 단순하고 직관적인 선악구조를 습득하는 편이 훨씬 설득에 수월하니 정직한 싸움판을 만든다.
독의 이미지가 이렇게 부정적인 형태로 굳어지게 된 것은, ‘뱀’의 힘이 가장 컸다는 생각이 든다. 독을 생각했을 때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상징적인 동물이 ‘뱀’이었기 때문에 그 부정적인 이미지도 ‘독’을 터부시 하는 데에 기여하지 않았을까? 각종 매체에서 등장하는 독의 이미지와는 별개로 대개 독을 갖는 생명체들은 대부분이 약자들이다. 포식자의 사냥 감각이 더욱더 예리하게 진화하는 것처럼 의 방어 수단 또한 진화에 진화를 거듭한다. 주변 환경에 녹아드는 위장술이나 위협용으로 제 몸을 불리는 행동을 배우는 것처럼 독은 약자의 무기다.
약육강식의 시스템의 아랫단에 놓인 생명들에게 독은 선택 아닌 필수였다. 독은 가장 효과적인 방어수단이었고 포식자들은 독을 가진 생물들을 쉽게 넘볼 수 없었다. 물론, 이들의 독이 만능 무기인 것은 아니었다. 몇 번씩이나 당하면서도 관찰하고 경험하면서 살아남은 이들은 적응하기 시작했다. 살아남는 자가 가장 강한 자라고 했던가. 이 시스템에서 승리자는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생명체였다. 습기가 턱 끝까지 차오르는 정글의 세계나, 심연의 색깔을 머금은 깊은 바닷속 생명체에게나 동일한 법칙이 통용된다. 오직,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나는 자연 다큐멘터리를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책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보는 일이 심심했다. 사냥하고, 사냥당하는 뻔한 이야기들만 나열된 영상들은 지루했다. 그 이야기들은 매혹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바라본 자연의 신비는 보다 많은 것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치명적인 피해 때문에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독성을 지닌 생명체들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에 대한 이야기임과 동시에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다만 이 시리즈에서 아쉬웠던 점은 독성을 가진 생명체에 대해서 집중해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니 ‘독’이라는 개념이 가진 독특한 특징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애초에 다큐멘터리 기획 자체를 ‘진화’에 초점을 맞춰서 독을 소개하는 형태라 다양한 생명체들이 독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보여주는 선에서 그쳤다. 이번 편에서는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지는 못했지만 다큐프라임이라는 프로그램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은 이런 점이다. ‘개념’을 가지고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을 학장해서 선사하는 부분. 이는 한국의 어떤 프로그램도 따라올 수 없는 경지다.
'진화에는 이유도 방향도 없다. 단지 운일뿐이다'
우연히 환경에 적합한 형질을 가지게 된 동물들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동물들은 죽는다. 이 말이 퍽 인상적이었다. 동물들이 그러했듯 이제는 사람들도 독을 품고 있다. 저마다의 기준을 두고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독은 내면에서 서서히 숙성된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온전히 본인의 방어를 위해 쓰일 뿐이다. 만화 영화 속에서는 악당들이 사용하던 비겁한 술수였으나 현실에서 독은 더 이상 무너질 수 없다는 선언 같아 보이기도 하다. 가혹하고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일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독을 품겠다고 마음먹는 사람에게는 좌우를 살필 겨를이 없다. 이는 생존에 대한 문제니까.
다 보고 나서도 여전히 진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보다 독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주는 다큐멘터리가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역사적으로나 의학적으로 독이 활용되었던 과정들을 보여줘도 충분히 많은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으니까. 다큐프라임은 그만한 이야기를, 충분히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또한 진화의 소산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진화하기 위해 적응하다보니 나름의 독을 생각해낸 것이 아닐까. 사람을 질문의 심연 속으로 끌어내리는 프로그램. 심연을 보다보면 당신은 당신의 무기를 찾아낼지도 모른다. 이 에피소드처럼. 무슨 일이든 관계없다. 어찌되었든 고유하면 강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