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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derer Jul 17. 2017

불일치의 이해

영화 '인디그네이션'

 모든 대화는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다. 대화는 전적으로 소통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손으로 하는 것이든 육성으로 나누는 것이든 동일하다. 내 의견을 상대에게 전달하고 상대의 의견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써 대화를 한다. '소통의 도구'로써 언어가 만들어지고 대화 기술이 진화해왔지만 여전히 세상에는 대화가 꺼려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아무리 설득해도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 자체를 하지 못하는 경우에 사람들은 소통에 좌절하고 대화는 단절된다.


 집단 별로 꼭 있다. 선배 그룹에도 존재하고, 후배 그룹에도 존재하고, 가정에도 존재하고, 일터에도 그런 사람들은 존재한다. 살아온 배경이 전부 다르니 바라보는 세계가 다를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여태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소통의 중요성은 모두가 공감한다. 하지만, 소통의 개념에 대해서는 모두가 다르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단절된다. 실제로는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편이면서 본인은 스스로를 평가하기를 소통을 잘하는 사람이라 볼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대개 불통은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만들어진다. 착각 속에서 단절은 고착화한다. 권위있는 사람일수록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이유가 이것이다. 으레하는 인사치레나 예의상 하는 말을 착각하고, 본인이 수용적인 사람이라 착각하고, 우리 회사나 우리 집에서 우리 단체에서 불통은 없다고 믿는다. 거기에 얹어 이해를 위한 '노오오오력'을 하지 않는다.


 최근 들어 '퍼실리테이션'에 대한 글도 많이 읽고 관련한 일도 몇 번씩 다녀오면서 '소통'을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참 많이 봐왔다. 퍼실리테이션은 회의를 보다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한 기술이다. 사람들은 보장된 자유,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저마다의 의견을 개진한다. 매끄럽게 이야기를 유도하고 말하게끔 만든다. 퍼실리테이션이 할 수 있는 일은 환경에 대한 것이다. 의견이 존중받는 상황을 만들어준다. 성별이나 나이, 지위를 떠나서 한 사람의 의견은 그 자체로 존중받는다.


 1955년 마커스는 대학에 입학했다. 징집을 피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걱정에 택한 길이었다. 마커스의 아버지는 참전했다가 목숨을 잃은 마커스의 사촌들을 많이 봤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걱정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걱정은 더욱 심해졌다. 그는 하나하나 아들의 생활에 간섭하게 된다. 대학에 가서도 간섭은 마찬가지였다. 통화만 하면 아버지는 걱정을 한 사발 쏟아내었다. 그렇게 입학한 대학 생활은 마냥 순탄하지는 않았다. 근원적인 문제는 '소통'이었다.


 아버지든, 학장이든, 사랑하는 사람이었든 마커스는 설득에 애를 먹었다. 서로 하고 싶은 말만 하다 보니 상대의 심정을 이해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서로 '당연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 부분의 차이를 줄이는 일이 어려웠던 것이다. 마땅히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존재하면 대화는 계속 겉돌 수밖에 없다. 때로는 말의 뜻 자체보다 상대의 상황이나 처지를 온전히 이해해야 비로소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는 경우도 있다. 본인의 상황과 처지를 쉽게 이야기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사람마다 아픔을 느꼈던 부분은 다르고, 그것의 크기 또한 전혀 다르니까. 이를 포용하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본인의 처지를 설명하는 만큼으로 상대의 처지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할 말에만 집중하고 들을 말에 집중하지를 않으니 서로의 울분이 쌓이는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왜 '내 말'을 듣지 않느냐는 물음이 공허하게 표류한 이유는 결국, 네 말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의미한 논쟁은 결국 무슨 말을 해도 상대가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자각으로 끝나게 된다. 그러니 울화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다. 어떤 말을 해도 변하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는 결국에 '수긍하라'는 하나의 선택지만 남기기 때문에, 죽어도 그 선택을 하기 싫다면 대화를 포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다.


 영화의 제목인 '인디그네이션'은 '분개'를 뜻한다고 한다. 의분, 분개, 분해하는 마음. 아마 영화에 흐르는 테마를 그나마 잘 표현하는 단어지만 확실히 한글풀이로만 들어보면 확 와닿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도 영화를 보고 나서는 '도대체 이게 무슨 영화였던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목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도 부족했고, 사실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봤지만 그 뜻을 알고 나니 비로소 온전히 영화의 맥락이 와 닿았다. 물론, 사전의 정의도 온전히 작품의 분위기를 설명하지는 못한다고 생각을 한다. 원작 소설이 있다고 하는데 이를 읽어보면 좀 더 알맞은 제목을 쓸 수도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이 전하는 내용과 정보에 비해서 영화가 전달할 수 있는 내용이나 정보가 한정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원작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보다 바꾸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더불어서 원작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들었다.


 말싸움하다 결국에 어떠한 설득도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의 울분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마냥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는 않을 것 같다. 영화에서 설득 불가의 상황은 가정에서 학교로 더 나아가 국가로 이어진다. 회피와 직면의 갈림길에 놓인 선택들은 개인의 인생을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마커스는 소통에 실패해서 여러 다른 선택들을 시도했고 그것들이 그를 옭아매었다. 영화를 보면서 마커스의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그런 생각들이 마커스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우리는 기나긴 세월 동안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했다. 서로의 조건을 따지기 바빴고, 딱히 필요한지도 잘 몰랐다. 지금도 그렇다. 낯선 거짓과 불편한 진실 중에 우리가 선호하는 것은 무엇이던가. 소통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정작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답을 못하는 상황은 아니었는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끝없는 질문 속에서 피어나는 생각은 하나다. 과연 우리는 정말로 타인의 눈을 바라볼 준비가 되었나?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인디그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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