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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derer Nov 24. 2017

기록을 남기는 이유

영화 '잊혀진 꿈의 동굴'

 어릴 적엔 일기가 정말 죽어도 쓰기가 싫었다. 꾸역꾸역 밀린 일기와 씨름하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 이유를 찾지는 않았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왜 그렇게도 일기가 쓰기 싫었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몇 가지 이유를 발견해냈다.


 첫 번째 이유는, 결국 이 일기를 남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숙제에 진정성을 바랄 수는 없었다. 보이는 일기였기 때문에, 그곳에는 자연스럽게 거짓말이 적히곤 했다. 본인의 생각을 쓰는 순간은 더욱 그렇다.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생각들이 훨씬 많은데, 그 부분을 빼고 일기를 써야 하니 학생들의 일기가 비슷할 수밖에.


 두 번째 이유는, 초등학생의 특성을 고려하지 못한 숙제 지침이었다. 일기 숙제의 저의는 학생에게서 ‘성실한 태도’ 등을 보는 것이다. 무릇 초등학생에게 성실한 태도란, 그날 하루를 얼마나 재미있게 뛰어놀았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라 생각한다. 학생들에게 어떻게 재미를 느꼈는지를 일기에 표현해보라고 한다면, 아이들은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독특한 표현을 짜내어 일기를 쓰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엄마에게 날씨를 물어보다가 왜 일찍 하지 않았냐며 맞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잘 생각해보라며 혼이 난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일기에 애정을 갖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적어도, 본인이 기록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렇게 일기에 학을 떼도, 자라면서 다들 한 번쯤은 일기를 다시 써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군대에서 유독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하루하루 비슷하게 흘러가는 군대의 일상은 새로울 것이 없었고, 무의미한 작업과 일과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했다. 오늘이 어제와 다른 이유를 찾아야 했다. 어렸을 때는 일기는 객관적인 정보가 무조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누군가에게 보여줄 것이 아닌 이상 일기는 굳이 객관적일 필요가 없었다. 그저 그 순간의 나를, 그날의 나를 나중에 봐도 잘 기억하게끔 만들어주는 단서들만 있다면 충분했다. 아주 사소한 것이더라도. ‘내게’ 의미를 주는 사실들이 모여서 의미를 만든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비단 우리들만의 일은 아니었다. 동굴 속에 살던 원시인들도 기록을 했다. 글자가 아니었을 뿐, 그들은 그들의 언어로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은 그들에 대한 이야기다.


 프랑스 남부의 아르데스 협곡, 1994년 크리스마스 며칠 전. 탐험가들은 한 동굴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동굴 안쪽에는 지금은 멸종된 동물들의 그림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탐험대장의 이름을 따라서 쇼베 동굴이라 명명된 이 동굴의 그림은 무려 3만 2천 년 전에 그려진 그림이었다. 단지 어느 한순간의 모양을 그린 것이 아니라, 동물들이 움직이는 모습 자체를 담아내려 했다. 동굴 벽화 속 동물 그림은 그들의 잔상을 담아내고 있었다. 교과서에서는 원시인들의 그림을 풍요로운 사냥을 기원하는 차원의 것으로 설명한다. 왠지 모르게, 이 쇼베 동굴의 벽화는 그런 차원을 넘어선 것처럼 느껴졌다.

 풍족한 사냥을 기원하는 것이었다면 왜 굳이 그들이 동물들이 움직이는 모습까지 그리려 했던 것일까? 이들의 그림은 일기처럼 느껴졌다. 명암의 대비를 넣을 정도로 세밀한 묘사, 역동적인 움직임까지. 시각과 청각, 촉각의 감각을 모두 담아내는 묘사는 눈이 휘둥그레 해진다. 열악한 장비와 인원으로 시도된 촬영이 역사의 경이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인류는 이야기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게 상상은 동굴에서 시작된다.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은 쉰 목소리로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진다. 끊임없이 생각을 하게끔 이야기를 만든다. 감독은 가장 열정적인 질문자의 위치에서 본인의 호기심을 아끼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호기심이 다큐멘터리를 이끌고 간다. 관객들은 그의 이야기에 홀린다. 동굴 벽화라고 해서 온전히 보전되지 않은 채로 사람들을 맞이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정말로 3만 년이나 전에 그려진 그림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생생하고 잘 그린 그림이었다. 원시인들의 그림이라 하면 그저 추상적인 형태의 동물 그림만 봐오다가, 이런 정교한 그림을 보고 나니 기이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쇼베 동굴의 그림은 어떤 그림의 스케치라고 봐도 될 정도로 대상의 특징을 확실하게 잡아내고 있었다. 원시인들의 관찰력은 그들의 기록을 의미 있게 만들었다. 대에 대를 이어 그 그림들은 전달되었을 것이다. 시간은 만물의 파괴자였다. 언젠가 맞게 될 ‘죽음’이라는 운명 아래에서 인간은 무기력했다. 무기력한 상태를 벗어나고자, 인류는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들을 잡으러오는 괴물에 맞서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남겼다. 본인이 죽더라도, 기록을 통해 다음 세대가 본인에 대한 ‘기억’을 하는 이상 시간은 인간들을 이길 수 없었다.


 기록을 통해서 사람들은 삶과 죽음을 이야기했고, 더 나아가 영혼을 노래했다. 영화의 끝부분, 동굴 벽화와 함께 들리는 피리소리와 웅얼거리는 사람들의 노랫소리는 우리와 전혀 접점을 찾을 수 없던 사람들을 이어주었다. 3D로 볼 수 없다는 아쉬움도 가슴 한편에 있지만, 그에 앞서 이들의 그림을 앉아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대단한 축복처럼 느껴졌다. 그들에게 의미 있는 기록이었을 이 그림들을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것과, 결과를 통해 다시금 의미를 만들어가는 현대인과의 교류는 묘한 유대감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질문의 이유를 따라가다 보면 직접 이곳을 촬영하고 탐험한 사람들의 설렘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림이라고 하는 하나의 문화 양식을 통해서 몇 만 년의 세월을 넘어서서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 우리의 일기는 앞으로 몇 만 년의 세월을 건너서 전달될 수 있을까?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잊혀진 꿈의 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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