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에서 면으로. 변해온 그곳, 한림제지
조치원에는 '한림제지'라는 폐공장이 있습니다. 1920년대에는 실크를 만들어내는 '제사공장'으로 쓰였고, 1974년부터는 종이를 만들어내는 '제지공장'이었던 공간이에요. 무척 나이가 많은 공장입니다. 전쟁을 거치면서는 조치원여자고등학교의 임시 교실로도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이곳을 고쳐 쓰려합니다. 도시재생이라는 표현으로 보면 익숙하실는지 모르겠네요. 이번에는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볼까 합니다. 한림제지와 함께 이곳을 바꿔가고 있는 한림제지 문화재생 협의체의 이야기입니다.
18.3.25~
처음 봤던 건 봄이었지만 다시 공장에 오게 된 건 여름이었습니다.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이곳을 바꾸기 위한 방편으로 시민들이 모였습니다. 한림제지 문화재생 협의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기존의 모임과는 다른 형식의 변화를 이야기했고, 곧이어 정례화된 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매주 월요일 4시, 저는 그곳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일을 했습니다. 시민들은 총 10주에 걸쳐 아이디어를 도출해냈고 다양한 범주의 고민들이 이어졌습니다. 도시재생이라는 키워드와 문화재생이라는 맥락을 통해 이곳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가끔 보면 항상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오래 있어서 존재를 알아차리기 어려운 것들이 존재하잖아요? 이 건물에 대한 제 첫인상이 그랬습니다. 한림제지 공장 내부는 텅 비어 있고 껍데기로만 남아있는 곳이었습니다. 거친 잔해로 덮인 공간은 옛 기능을 떠올리기 무척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처음 이곳에 들어가 볼 수 있었던 건 올해 초였습니다. 추위와 칼바람 속에서 공장을 견학하는 일은 무척 으스스한 경험이었어요. 삐걱대는 소리는 덤이고, 겨울이라 그런지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이곳의 가능성이 크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겉모습이 훨씬 더 인상적이었거든요.
처음 이곳의 역사를 듣게 되었을 때에는 그 이름 자체도 생소했습니다. 제삯공장? 재삿공장? 스물일곱까지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이름이었습니다. 생소한 이름은 무척 신기했습니다. 왠지 한 번은 들어볼 기회가 있었을 거 같은 이름이라 더욱 그랬고요. 제지공장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만 제사공장은 음... 처음에는 제기(祭器)를 만드는 곳이 제사공장인가? 하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실을 만들던 곳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조금은 이곳의 이미지가 정리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실을 자아내던 공장에서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변하게 된 데에는 알 수 없는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부러진 전선과 깨진 창문들 속 비어있는 무언가를 찾아야 했습니다. 선과 면 너머. 제가 본 한림제지의 느낌은 이랬어요.
실은 선이고, 종이는 면이다.
선에서 면으로, 제사공장에서 제지공장으로.
선에서 면으로 변해온 이곳에 필요한 건 '색'입니다. 어떤 색을 써야 할지, 어떤 조합으로 만들어야 그림이 어울릴지 보는 일이 이어졌습니다. 저마다 완성된 그림은 다를지라도 부분 부분 놓고 보면 비슷한 구석도 무척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때로는 명확한 기능을 이야기하기도 했고, 때로는 분위기에 대해서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야기가 더해지고 섞여들며 세계가 만들어졌습니다. 이곳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단정 지어 부를 수 없지만 좋아질 거라는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좋아질 거라 믿는 만큼 만드는 사람들의 욕심이 들어가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비어있는 만큼 다양한 그림을 그려볼 수 있으니까요.
아이디어를 고민하는 일이 마냥 편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실은 무척 피곤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다양한 생각들을 쏟아내는 만큼 중복되는 이야기도 많았거든요. 10주의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과연 이렇게 자유롭게 의견을 내고 피드백하는 과정이 맞는지를 자주 고민했습니다. 간혹 의견만 내는 일을 그만하고 뭐라도 실행하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한림제지는 천천히 가야만 했습니다. 서두를 이유는 없었습니다. 천천히 가야 그만큼 조심할 테니까요. 역으로 생각해보면 반복되는 이야기는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라는 의미니까요. 중복되는 이야기들은 사람을 중심에 두는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나름대로 숨 고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토해내듯 서로의 목소리를 높였던 그 순간을 조금만 지나 보니 다른 길이 생겼습니다. 일단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한림제지라는 공간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했습니다. 13주에 걸친 모임이 확실한 일정으로 스케줄에 고정되면서 사고 회로가 변했습니다. 각자 다른 일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이곳을 언제든 일상과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게끔 말이죠. 한림제지라는 공간이 일상 속에서 숨 쉬려면 이곳이 보다 가벼워야 했습니다. 이곳을 막 대할 수 있어야 이곳을 통한 큰 그림을 그려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이름이 갖는 무게에 짓눌려 상상을 자유로이 풀어놓지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실패하면 안 되는 공간'의 무게는 상상의 자유도 막아버립니다. 정작 이곳을 마음껏 실패해도 되는 공간으로 만들어보고 싶어 하면서도요.
~18.10.31
일정이 조금씩 미뤄지고 정체되는 중에 학사동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시간의 무게를 견디기 버거웠던 건 한림제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림제지 학사동은 복원을 위해 바뀌어야 했습니다. 부랴부랴 사진을 찍기 시작했죠. 짧은 텀으로 자주 들르면서 어떻게든 카메라에 담아보려 했습니다. 학사동의 마지막 순간을 마주하며 느꼈던 감정은 오묘했습니다. 복원을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만나게 될 걸 알면서도 그랬습니다. 헛헛한 감정을 뒤로하고 나아가기로 합니다. 우리들은 행동의 시간을 마주해야 했고, 움직였습니다. 빠듯한 일정 중에도 날을 쪼개어 계획을 세우고 이곳을 소개하기로 합니다.
해피 할로-원!
학사동은 완벽한 무대였습니다. 왜냐면 계획한 그날은 10월 31일이었고, 마침 할로윈이었죠. 조치원의 할로윈인지라 프로젝트는 할로'원'이 되었습니다. 할로윈에는 사람들이 신기한 복장을 입고 돌아다닙니다. 별별 복장을 입은 사람들과 폐허의 마지막 한 숨은 무척 조화로웠습니다. 일 년의 한 번 정도는 그래도 된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었기에 그날이 좋았습니다. 사람들이 조금은 타인에게 관대해질 수 있는 날이기도 하니까요. 짙은 안개가 자주 끼는 조치원이지만 그날만큼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얼굴도 선명하게 보였고요. 아예 걱정이 없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한림제지라는 공간에 사람들이 모여 일궈내는 일들을 소개하는 첫 행사였으니까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다행히도 얼굴에 의아함보다는 호기심이 더 크게 비쳐 보였던 것 같습니다. 역시 마력의 할로윈. 마음의 빗장이 조금은 느슨한 날이라 더 편하게 다가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날은 추웠어도, 손은 조금 얼어있어도 머리는 얼어있지 않았습니다. 생각이 잘 안 떠오르면 방식을 바꿔볼 필요가 있습니다. 환경도, 패턴도요. 이번에 '할로원' 행사를 진행하면서 좋았던 건 뛰고 걸어 다니면서 생각해볼 수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카메라로 사람들을 바라보며 표정을 읽어보고, 카메라에 담지 못한 이야기를 생각하면서요. 재밌는 아이디어와 개선해야 하는 부분이 명확하게 보였습니다.
18.11.1~
31일은 지났고, 모두들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시 한번 치열하게 생각을 이어봐야 할 거 같습니다. 행사의 끝은 다음 기획의 시작이 될 것이고, 끊임없이 일이 이어지면 그렇게 쌓인 이야기가 바뀐 한림제지의 한쪽 벽에 기록되겠죠. 한림제지 문화재생 협의체에는 다양한 시민들이 모여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이곳에는 더 많은 사람들의 눈과 손, 무엇보다 발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한림제지를 가꿔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더 많은 관심을 받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이런 이야기들이 기분 좋은 압박이 될 거 같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곳의 이야기가 퍼질수록 이곳을 위해서 행동하는 사람에게 더 큰 힘이 될 테니까요. 한림제지의 색을 더하기 위해서 움직이겠습니다. 색으로 기꺼이 만방의 사람들이 모여들게끔 만들고 싶습니다.
그 바람이 바래지 않게, 너무 늦지 않은 시점에 새로운 한림제지 이야기로 글을 들고 오고 싶네요.
(한림제지 이야기는 꾸준히 페이스북 '한림제지 아카이브' 페이지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한림제지 아카이브 주소: https://www.facebook.com/HL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