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지

하나로 모자라서 다큐멘터리를 하나 더 만들었다

by wanderer

작년 여름. 다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 더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요. 마침 그러던 중에 도큐멘타 전시에 팀으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게 될 기회가 생겼어요. 조치원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일. 이야기를 만드는 일은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와는 별개로 무척 할 말이 많은 주제였습니다. 공동체 아카이브는 우리의 감상이 주가 아니라 이곳에 어떤 사람들이 모여서 살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였고, '세종시'라는 더 큰 범주의 이야기였으니까요. 조치원은 훨씬 더 자신 있었습니다. 저는 변화가 생겨날 무렵 이곳에 왔고 변화를 체감하면서 7년을 보냈습니다. 나름 이곳의 생리는 잘 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중요한 건 무슨 이야기를 어떤 논조로 풀어내느냐 하는 문제였어요.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청년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이곳을 거쳐간 선배, 후배들의 이야기요. 잠깐 이 곳에 정차해있는 저의 입장에서 관찰한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었습니다. 지방 대학생이라는 존재는 무척이나 기묘합니다. 이들은 영원한 이방인 같은 느낌을 줍니다.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들도 학생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학생들도 이곳의 주민들을 기억하지 못한 채 헤어집니다. 물론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야 한둘이겠냐만은 그래도 4년이나 시간을 내어주는 공간인데 말이죠. 서로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로 헤어지게 된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목표를 세웠습니다.


'적어도 이들에게 서로의 이름을 기억할 시간 정도는 만들어주자'고요.
구 조치원역의 모습

이야기는 조치원역에서 출발합니다. 어떻게 풀어낼지 고민하다 번뜩하고 떠오른 느낌이 '역의 운명'이라는 아이디어였어요. 역은 평생 머물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에요. 언젠간 이별을 마주해야 하는 공간입니다. 잠깐 허기를 달래려 음식을 사 먹을 수도, 화장실에 갈 수도 있지만 떠나야만 합니다. 떠나야만 한다는 느낌이 주는 허한 감정과 쓸쓸함에서 무언가를 끌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집을 가기 위해 이곳을 오가며 느꼈던 가장 큰 감정, 역의 운명. 이 모든 과정이 한 호흡으로 이어졌습니다. 대학생들과 역이라는 공간이 매치되면서 시간이 겹쳐 보였습니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집으로 넘어가는 길에 다큐멘터리의 첫 문장을 써 내려갔습니다.


흔히들 우리가 먹은 것이 우리를 만든다고 합니다.
혹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를 설명한다고도 합니다.
사실, 이런저런 설명은 따지고 보면

우리가 어떻게 하루를 살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샀고, 무엇을 생각하며 사는지.
우리는 오늘 하루를 충분히 쓰면서 보냈던가요?
우리는 여기서 멈춰 하나의 질문을 더해보고자 합니다.

당신의 하루를 만드는 어떤 질문.

당신은 오늘 어디서 눈을 감습니까?


시기별로 나누어 이야기를 수집했습니다. 제일 먼저 이곳의 삶이 익숙해진 사람들의 투덜거림부터 들어보면서요. 이별을 준비하는 철새들의 이야기 다음 들어볼 건 이곳에서 계속 살아왔던 이들, 텃새들의 목소리였습니다.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텃새들의 목소리를 들어보고는 이내, 이곳을 떠난 이들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태어난 곳, 고향에 이미 많은 시간을 쓰고 온 이들에게 이곳이 고향이 되기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고향이라 말했던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떠나는 이들의 이야기는 이곳을 처음 마주하는 이들의 목소리와도 참 잘 어울렸습니다. 새내기의 호기심은 모험가의 도전 정신과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취업 전선과 대학가로 각기 행선지는 다르지만 미지의 세계에 도전한다는 부분에선 무척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나저러나 겪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세계니까요.


예전 기억을 떠올려보면 선배들은 '마음의 고향'이라는 표현으로 이곳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고향이라는 단어를 곱씹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잘근잘근 몇 번이고 그 말을 씹어보면서도 이질감을 느꼈습니다. 달랐습니다. 아무래도 고향이라는 단어가 무거웠습니다. 태어나서 자란 곳,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각기 다른 표현들이나 지극히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얼마나 살게 되면 그 공간을 '고향'이라는 말로 불러볼 수 있을까요? 상상하기 어려운 시간과 무게였습니다. 철새처럼 이곳을 떠나는 청춘들과 몇 번이고 이별을 마주하는 텃새들 각자의 감상이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생각이 확실해졌습니다.

이곳을 우리가 고향이라 부를 수는 없다는 것.

그러면서 또 하나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을 부를 수 있는 이름을 새로 지어주자는 것.


둥지라는 이름의 프로젝트가 되었습니다. 프로젝트 둥지는 철새처럼 조치원을 떠나는, 떠날 예정인 청춘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하고, 고향도 그들에게서 잊힙니다. 하지만, 이들이 마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만은 아닙니다. 조치원이 청춘들의 고향이 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철새들의 둥지가 될 수는 있지 않을까요? 많은 이들이 오갈 수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락함이 담겨있는 이름을 짓고자 해서 생각해낸 말이었습니다. 고향이라는 말에는 시간이 필요한데, 우리는 그 시간들을 이미 태어난 곳에 다 주고 와버렸습니다. 이곳에서 마주하는 사건들은 전혀 새로운 경험으로 피부에 스며듭니다.

세종전통시장 내부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이 고향이 아니라는 이유로 많은 것들이 당연해졌습니다. 언젠가 떠날 곳이라 생각하거나, 언젠가 떠날 이들이라 생각한다면 사실 서로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어집니다. 어차피 갈 사람들이고, 다시 안 볼 거라 생각한다면 말이죠. 어찌 보면 그 부분에서 오해가 시작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 대신 집단의 이름으로 호명되는 사이에서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린 참 많이 돌아다닙니다. 태어났던 공간에서 나이 들고, 마지막을 맞는다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대학을 가든, 취직을 하든, 이민을 가든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지역에서 살아야 하는 순간이 오곤 합니다. 오히려 이방인으로 머물다 보면 두고 온 고향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막상 고향에 있을 때에는 고향 생각을 잘 못하게 되는데 말이죠.


그래요. 사실, 고향이라는 말은 너무 무겁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이 둥지였으면 합니다.

철새들의 이야기도 머물 수 있는 곳이길, 그 순간들의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해주길 바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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