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문화로 종전 캠프 여행기
DMZ 국제다큐영화제는 언제나 생각만 하고서 선뜻 도전한 적이 없었던 행사였습니다. EIDF는 제대하고 나서부터는 꼬박꼬박 챙겨갔는데 왠지 DMZ 국제다큐영화제는 도전할 수가 없었어요. 'DMZ'라는 이름에서 압도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의 주제는 가볍지 않았고, 가벼워져서도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테마를 담아내는 다큐멘터리들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칩니다. 오히려 가까이에서 벌어지는 삶과 죽음에 무뎌지면서 스크린을 통해 그런 마음을 갖는다는 게 어색했어요. 그런 이유로 저는 한 번도 이곳에 온 적이 없었습니다.
낯설게 보는 건 좋아하지만, 저는 결코 저를 낯선 곳에 내던지는 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평소의 저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일을 하다 보니 사람이 의욕이 생기는 때가 가끔씩 오더군요. 그럴 때에는 스스로를 불태울 땔감을 주섬거리는데요. 마침 찾은 땔감이 DMZ 문화로 종전 캠프 이야기였습니다. 사는 곳이 사는 곳이다 보니 영화제 일정을 완전히 소화하는 일은 물리적으로 어려웠고 무박 2일로 진행되는 일정 정도면 가능하겠다 싶었어요. 그러고 정신을 차려보니 제 눈 앞에는 도라산역이 이렇게.
무슨 이유에서인지 '도라'라는 이름이 계속 입에서 맴돌았습니다. 왠지 계속 쓰고 싶어 지는 이름이라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도라. 도라. 도라. 몇 번씩 입에서 굴려봐도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좋았습니다. 무척 여운이 깊게 남는 공간이었어요. 첫인상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좋았습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준비된 공간이라는 느낌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만큼 꾸준하게 손질되어 왔다는 말이니까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역의 모습. 기차의 진동은 느껴지지 않아도 이곳은 당장에라도 문을 활짝 열 수 있겠다 싶은. 멈춰있는 역은 어색하기 마련인데, 이곳이 어색하지 않았던 건 그만큼 쉽게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상상할 수 있어서 일거라 생각합니다.
무척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을 오갔다는 기록들이 남겨져 있어요. 베를린 장벽의 일부분도 있고, 엷게 먼지가 내려앉은 창문 위로 사람들의 이름들도 수북하게 늘어져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이름들은 통일이 된다면 남쪽으로 여행 올 사람들이 가장 먼저 보게 될 이름들이겠죠? 그 이름들을 하나하나 읽어보면서 다르고 같은 부분들을 골라보기도 하지 않을까요? 분단이라는 현실과 통일의 복잡다단한 관계 속에서 이곳, 도라산역은 산의 기품과 무게를 온전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서툰 갈등은 감히 이 자리에 발을 들일 수가 없습니다. 이곳은 순수하게 상상만으로 즐거워지는 공간입니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까지 뻗어있는 '유라시아 횡단철도 노선도' 그림이나, '출경(出境)', '타는 곳 평양 방면'이라는 생소한 표현들을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무심하게 우리가 쓰는 언어에 갇혀 세계를 잊어버리곤 합니다. 이런 단어들은 정체된 일상의 흐름을 아주 약간씩 움직입니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펼치는 상상의 크기는 사실 생각보다 작습니다. 핸드폰을 통해 펼쳐보는 지도의 크기는 살고 있는 공간을 벗어날 이유가 없죠. 가야 되는 곳까지의 위치와 방향을 볼 수 있으면 되니까요. 도라산역 플랫폼을 거닐며 느꼈던 상상들은 이곳을 이용할 사람들에게는 무척 현실적일 이야기들입니다. 단지 지금 눈에 보이지 않으니 막연하고 미래의 것으로만 느껴지는 것이겠죠. 이런 사소한 표현들부터 상상해보고, 적용해보고 그려보면 생각보다 넓게 세상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끝으로 이곳을 나왔습니다.
캠프 그리브스는 무척 조용한 곳이었습니다. 울창한 나무들이 내뿜는 눅눅한 공기가 피부로 느껴지는 공간은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게 만들었습니다. 차분한 입장 정리. 지난한 반목과 갈등 구조 속에서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로의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장소로 어울릴 것 같았거든요. 이어지는 특강을 들으면서도 많은 생각을 했지만, 결론은 동일했습니다.
공유해야 공감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대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 알지도 못하는 혹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내용을 두고 마음을 얻을 수는 없죠. 우리는 종종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마음을 밀어붙여 이야기하곤 합니다. 충동하는 감정에 휩싸여 생각을 뱉어내고 나면 무엇이 남는 건가요. 저는 그런 방식은 설득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설득은 충분히 제 시간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북 간에 좀 더 시시한 질문들이 많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다른 점도 있고, 비슷한 점도 있겠지만 이것저것 들어보고 말해주면서 조금씩 서로에 대한 인식을 명확하게 다지는 과정이 있으면 어떨까 합니다.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해도 완충을 위한 이해는 필요하고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다큐멘터리 작가입니다. 제가 카메라로 담아낼 수 있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하지만, 남한 다큐멘터리 작가 입장에서 북한의 다큐멘터리를 찍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정작 가장 가까이 붙어있는 곳에서 촬영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저 너머에 산재해 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북한을 다루는 외국인의 시점과 한국인의 시점은 분명 차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강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아카이브를 만드는 일에, 상상하는 일에 힘을 보태고 싶다는 이야기를 덜덜 떨면서 했습니다. 어떤 맥락으로 기록을 기록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추후에 생각해볼 일입니다. 하지만, 어떤 기록이든 충분히 재밌고 의미 있는 기록을 남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있습니다. 참여자들 간의 이야기가 짧게 끝났던 부분은 아쉬웠지만,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그렇게 무박 2일간의 일정이 마무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