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와일드'
영화의 도입부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발톱이 빠져서 고통스러워하는 여자가 산에서 떨어트린 신발에 대해 소리를 지르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나는 영화의 제목을 보여주기까지의 그 3분가량의 도입부가 참 멋있어서 두어 번 돌려봤었다. 오프닝 부분을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만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하며 보다 보니, 어느새 그녀는 건조하게 말라비틀어진 길을 걷고 있었다. 그녀의 등에는 삶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한 ‘괴물’ 같은 배낭이 메어져 있었다. 그녀는 왜 그만한 크기의 배낭을 짊어지고 걷고 있는 것일까. 고행을 통한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속죄를 원하는 것이었을까?
셰릴은 길을 걸었다. 왜 하필 그 길, ‘PCT’ 여야 했는지 알아보는 일은 더뎠다. 내리쬐는 태양과 모래와 잡목밖에 없는 그 길은 삭막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길을 걸어야만 했다. 입버릇처럼 언제든지 끝낼 수 있다 말했었지만 실상 그녀에게 돌아갈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녀는 걷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녀도 그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돌아갈 곳은 없었지만, 막연하게 ‘돌아갈 곳’에 대한 모습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힘을 얻었다. 그래서 그녀는 서툴지만 계속 길을 걷는다. 비록, 몸에 잔 생채기가 나고, 연료를 잘못 사 와서 식은 죽을 먹고, 제대로 씻을 수도 없었지만 길 위에 서있었다. 인생이 남기고, 그녀가 외면했던 고통과 고민의 흔적들은 길에서 마주하는 돌들처럼 영화의 군데군데에 놓여있었다. 그녀는 무너져가는 삶의 끝자락에서, 어떻게든 그 옷깃을 붙들고 살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걷는다.
길을 걷는다는 것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태양이 내리쬐는 지옥의 트래킹 코스를 걷는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영화의 제목처럼 거칠게 살아남는다는 것을, '생존'을 의미한다. 자연은 각박하다. 처절하게 부딪혀야 생존을 보장받는 그런 곳이다. 우리가 평범하게 살아오던 도시의 삶과는 거리가 있다. 도시의 삶이 기본적으로 우리의 생존을 보장받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라면, 자연 속에서 산다는 것은 생존 그 자체의 의미다. 자연 속에서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서 행동한다. 반대로, 도시 혹은 문명 속에서는 생존을 보장받으며 살아간다. 물론, 생존을 보장받고 살아도 삶의 무게는 각자 다른 형태로 다가온다. 영화는 살면서 버겁다 못해,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게끔 만들어줬다. 필요한 준비물은 있어야 하지만, 과연 필요 이상으로 짐에 욱여넣고, 걱정이나 하면서 끙끙대 온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본인이 짊어질 배낭의 무게를 본인이 알아서 정할 수 있다.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이, 여행을 준비하는 것은 살아가는 것과 상당히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각자 다 다른 의미를 가지겠지만 말이다.
내 삶의 형태는 무엇이었는지 생각을 해봤다. 지금까지의 생활을 돌이켜보면,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안에서 밖을 바라보면서 '살고 있다'라고 느끼면서 살았던 것 같다. 앞으로 경험할 일들은 때 이른 북풍처럼 매섭게 나를 몰아치게 될 텐데, 어떻게 그것을 넘길지는 모르겠다. 왜 사냐고 물었을 때에 그저 살아지니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살면서 무언가를 증명해내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선택이 어떻든 길은 우리가 어디에 있건 그 자리에 있다. 세상에 방황하는 사람들 모두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언제든 우리는 다시 길로 돌아가서, 우리가 무엇을 놓치면서 살아왔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랬기에 더더욱 그녀의 마지막 독백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와일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