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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젊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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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derer Feb 29. 2020

청춘의 색은 무엇인가

영화 '레토'

 이토록 밝게 빛나는 흑백 영화는 본 적이 없다. 눈부신 흑백의 명도. 청춘의 어느 때를 잡은 카메라는 그 어떤 색보다도 풍부하고 다채롭다. 영화는 묻는다. 단순한 질문 몇 가지다. 당신의 청춘은 무엇인가. 그 청춘의 모습은 어땠는가. 그 청춘의 색은 무엇인가.


 억압되고 통제된 사회 속에서의 예술가는 개인으로 남아있을 수 없다. 표현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이들은 의식적으로도 무의식적으로도 다수의 목소리를 대변해내게 된다. 단지 젊은 날의 반항심이라거나 치기 어린 경솔함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부족한 설명이다. 충분히 도피할 수 있는 일이고, 타협의 목소리를 낼 수도 있으니까 따지고 보면 표현의 모습은 다양한 셈이다. 다만 저항하지 않는 목소리는 청춘의 힘은 아니다. 여타의 논리로 밀어붙여져 견딜 수 없는 처지에 놓이더라도 밀릴 수 없는 자존심이 있어야 그래도 청춘이다. 개중엔 보다 영악한 청년들도 있기야 하다만 그런 이들이 등장할 정도로 촘촘해지면 영화는 낭만을 잃는다.


 언제나 영화 속의 어른들은 그보다 어린 청년들에게 못내 당해주거나, 허술한 세계 속에서 우스꽝스럽게 등장한다. 젊음은 타오른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목소리를 찾아 모여든다. 소리를 지르거나, 환호할 수도 없는 극장에 앉아서도 기대하는 눈빛들은 여전히 반짝인다. 그저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것만으로 제지받는 처지에서도 말이다. 통제할 수 있는 건 하나의 순간이지 그 시대와 감정이 아니었다. 해변으로 나온 청년 가수들의 모습은 햇빛을 흠뻑 받는다. 흑백의 세계 속에서도 그들의 얼굴은 결코 어두워지지 않는다. 심지어는 해가 모두 진 바닷가에서도 크게 타오르는 모닥불에 빛을 받아 꺼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흑백 영화의 강점은 어둠의 표현에 있다. 깔끔한 암흑의 깊이가 풍미를 더한다. 곰곰이 느껴봐야 아는 맛이어도 충분히 깊은 맛이다. 정반대의 표현법을 따르는 영화의 모양새는 '여름'이라는 제목처럼 뜨거워진다. 그러니 색이 없다고 해서 차가워질 일은 없는 거다. 한참 넓게 뿌려졌던 봄의 씨앗이 본격적으로 뻗어오르는 시기. 가능성은 이미 그들 안에 살아 있었다. 싸늘하게 죽어있는 겨울의 한기가 아니라, 봄의 생기로 출발을 하는 형태로.


 빅토르 최라는 사람의 더 많은 노래가 궁금해서 접하게 된 영화였는데, 그보다는 복합적인 영화였다. 이름조차 정하지 않았던 밴드의 목소리. 선율을 타고 함께 무대를 꾸며보기도 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처음에는 낯선 분위기와 환경 속에서 가끔씩 터지는 상상이 인상적이었다면, 점차 그 가사 하나하나를 주목해서 보게 된다.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던 시기에 목소리를 냈다고 하는 점. 사회적인 것처럼 느껴졌던 이야기들이 응집되어 그 시절을 살았던 한 사람의 목소리로 다듬어지는 과정이 매력적이다. 시대가 청년이라는 이미지를 보는 형태도 그런 것이지 않을까 싶다.


 시대의 목소리들은 다들 어딘가 비슷한 부분이 있다. 밥 딜런이나 김광석이나 빅토르 최나 다들 비슷한 느낌이 났다. 밥 딜런의 모습은 <더 프리윌링> 앨범에서의 얼굴이, 김광석의 모습은 '이등병의 편지' 노래를 부르는 부분에서 기억이 남는다. 인상적인 건 아무래도 젊음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청년들이 창의적인 그룹으로 보이는 것은 가장 개인적인 그룹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힘이 그 안에 있기에 독립적일 수 있고, 설득할 수도 있다. 흑백으로 색이 빠져나간 자리에 0과 1만 남는 것만은 아니다. 부르기에 어려운 색의 조각이어도, 제 이름을 찾아가는 일이 어려운 것이지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 스러져간 모든 젊음의 목소리가 그렇듯이.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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