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바람이 났고, 집안은 이제부터 지옥이다. 이복동생이 생겼으니까. 고3 인생에 이보다 더한 불운이 어디 있을까. 어떻게든 이 상황을 잘 마무리해야 한다. 대충 알고 있던 이야기라도, 남의 입을 빌어 듣게 되면 그 감상이 다르다. 이제는 손에 잡히는 이야기다. 풀어내야 하는 문제이고 외면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런데 어른들의 행동은 이상했다. 관계가 너무 복잡하게 얽혀있는 탓인지 다들 그 자리에 머물러있으려 했다. 사실, 관계가 명백해진 이상 나아가야 하는 길은 단순하다. 삶에 조금이라도 더 책임감 있게 마주 서야 한다. 무엇이라도 조금씩 선택을 하고 결정해야 했다. 동생마저 세상에 나왔으니까. 주리와 윤아는 그렇게 어른들이 하지 못했던 일들을 준비한다.
벌어진 사건을 해결하는 사람의 몫과 감당해야 하는 사람의 몫이 다른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불륜이라는 사건을 해결해가는 주리와 윤아의 여정이 그랬다. 어쨌든 이복동생이 생겼고, 작디작은 그 생명의 힘은 너무도 미약했다. 자그마한 아이를 두고 모종의 책임감을 느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정작 이 사건을 매듭지을 어른들은 행동할 수 없었다. 불륜이라는 관계 속에서 어른들의 행동은 감정적이었고 이기적이었다. 하지만, 당장 누군가는 필요한 일을 해야 했다. 그렇게 관계가 역전된다. 성인과 미성년자라는 위치의 역전. 책임질 일을 만든 건 어른들이었지만 정작 해결에 나선 건 학생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단지 학생들의 행동에만 모든 것을 걸진 않는다. 답답하지만, 타당한 어른들의 모습도 눈길을 잡아끈다. 사실, 처음부터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으니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다. 영화에서 인물들이 택할 수 있는 선택의 수는 극히 비좁아 보였다. 이미 색안경을 쓰고 사람을 보게 되어 있는데, 행동과 대사가 그 인식을 허문다. 과해서 짐짓 옹호하게 만들지도, 부족해서 비난만 하게 놔두지도 않는다. 한참 나이를 먹은 어른의 세계여도 책임에 쉬운 사람은 없었다. 영화는 그런 방식으로 재미를 만들어냈다. 대책 없는 어른들의 모습은 의외로 이야기를 다채롭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 무엇이 있을지를 상상하기 조차 어려웠다.
독창적인 이미지들인데, 그 이미지가 심지어 선명하다면 충분히 좋은 영화다. 그 지점에 있어서 이 영화는 재미있는 부분이 무척 많다. 영화에서 묘사하는 상황들은 익숙한데 상황에 덧붙이는 이미지가 익숙하지 않다. 두 학생이 벌이는 격한 싸움도 그렇고, 영주의 피부 톤 같은 부분도 그렇다. 화면을 보면서도 계속해서 머릿속으로는 상상을 이어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디테일한 부분에서의 묘사가 날카롭게 들어와서 자연스럽게 감상이 덧붙여지는 느낌이었다. 신경 써서 매만져진 화면의 부분들은 때론 설명을 채우고 때로는 이야기를 잇는다. 세련되지만 아주 솔직한 이미지, 날 것 그대로의 목소리인데 태연하게 이를 듣게 만드는 힘에 놀랐다.
성인이 되기 직전의 선. 열아홉의 나이에서 학생들은 경주마 같았다. 옆의 누구도 안중에 두지 않는 경주마. 넓게 볼 수는 없었고 바로 앞에 넘어야 하는 허들만 보였다. 모든 선택과 결과는 두 가지였다. 넘어지거나 넘어가거나. 자신만의 싸움이라 부를 수 있으면 참 속 편한 일일 거다. 무엇 하나 공부의 궤적에서 벗어난 일이면 '막사는 인생'이 되는 일. 당연해졌던 건 오롯이 나 하나 정도로 작아진 책임감 정도였다. 공부 안 하면 큰일 난다는 소리 같은 건 사실은 거짓말이다. 감당해야 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할 때의 부끄러움이 더 큰일이니까. 공부 안 해서 벌어질 큰일 같은 건 사실 그때 가서 감당해도 되는 일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