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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젊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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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derer Apr 28. 2020

미소의 세상

영화 '소공녀'

 미소는 가장 먼저 집을 포기했다. 살면서 고민하는 선택지 중 여건만 된다면 가장 먼저 고르는 게 집일 텐데 말이다. 가진 물건 중 가장 큰 짐덩이. 고정 비용처럼 내 삶의 반은 집이 갉아먹는데, 이건 타협하기 쉬운 대상이 아니다. 디지털 노마드가 되건, 가사 노동이 되건 고정적이지 않은 일터라면 고민은 해볼 수 있겠다. 심리적 안정감, 가지고 있는 물건들. 미소에게 포기할 수 없는 수만 가지 이유보다 중요한 기준은 행복이었다. 나의 행복, '지금'의 행복이었다. 지금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고, 행복할 수 없는 이유도 간단했다. 집의 여부는 골칫거리였다. 싸게 들어간 집은 안락하지도, 따뜻하지도 않았으니까.


 집을 포기한다는 결정은 미소에게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고, 큰 결정이었다. 다만 집을 포기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그 결정보다는 훨씬 더 놀라운 일이었다. 포기라는 선택은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집을 먼저 포기한다는 선택은 미소였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미소가 하는 일은 가사노동이었다. 다른 이들의 집을 청소하고, 요리도 했다. 언제나 자신의 허물을 치우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법이다. 그녀는 다른 이들의 집을 치우면서도 자신의 집을 갖지 못했다. 역설적이게도 말이다. 집을 찾아 떠난 미소의 여정은 오히려 집이 있는 사람들에게 자극을 준다. 충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여행자의 발걸음은 작지 않은 울림이었다.


 에쎄 담배와 글렌피딕 위스키. 담배값도 오르고, 술값도 올라만 갔다. 결국, 에쎄 담배는 디스로 바뀌었다. 세계관을 만드는 힘은 취향이지만, 세계를 지키는 힘은 아무래도 돈이다. 사람들은 금방 돌아올 수 있을 것처럼 세계관을 포기한다. 돈이 없어 좋아하는 것들을 포기하게 된다. 사람들은 언제든 돌아올 수 있을 것처럼 의지를 불태우며 돌아서지만, 그 뒤로 돌아오는 이는 없다. 돈 때문에 좋아하는 걸 포기하게 되면 그 뒤로는 새로운 취향을 만들지 예전의 관심사대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여유로워진 이후의 세계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다. 알게 된 만큼의 시야로 내딛을 수 있는 범위가 달라진다. 쓰는 단위가 바뀌면 생각도 바뀐다.


 소신과 아집 사이의 길. 판단 불가의 영역에 놓인 독자적인 방향성은 취향으로 굳어진다. 그 범위가 크게 남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취향이고, 건드리면 혐오로 넘어간다. 그 두 가지 단어의 흐름은 묘하게 붙어있다. 사회에 취향을 존중해달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혐오라는 감정이 단어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물리적인 사건으로 발발했다. 추상적인 불편함과 불안감이 구체적인 증오의 행동들로 굳어졌다. 존중이라는 행동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수심 속에 가라앉아 있던 감정을 헤집었다. 미소의 행동을 두고 왈가왈부했던 밴드원들은 그런 마음을 품고 미소를 본 건 아니었을까. 고집스레 그 취향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은 그저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 자체로 삶을 부정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게 했을 거다.


 밴드 시절의 꿈은 모두에게 버려졌다. 그 시절의 열정을 마치 모두 잊어버린 것처럼. 젊었던 한 때의 그럴 수 있던 일탈로써. 다만 그 과정의 소산이 어떤 방식으로 개인들에게 스며들었는가는 생각해볼 만하다. 꿈의 크기는 극단적으로 양극화되었다. 꿈의 소유권은 현실의 각박함에 자잘하게 깎여나갔다. 도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꿈의 영역에 머문다면, 그에 도달하는 정도와 과정에 시선이 머물기 마련이다. 되고 싶은 '사람' 혹은 '일'에 대한 관점이, 되고 싶은 '상태'가 되어 간다. 과학자와 대통령의 상관관계는 건물주와 연예인의 상관관계와 같지 않다. 불안한 기틀 위에 자신만의 기준과 척도는 돈이라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치환된다. 그렇게 돈으로 세운 세계는 결코 이전과 같아지지 못한다.


 무엇이 존재의 죽음인가. 삶에서 지워진 상처는 무엇일까. 이런 고민이 생각날 즈음에는 밴드원들이 장례식장에서 모이는 장면이 오버랩되기도 했다. 모종의 이유로 꿈을 포기한 이들은 무슨 삶을 얻어낸 걸까. 버린 꿈에 충분히 애도치 못하고 새로이 얻은 생활에 너무 빠르게 적응해버린 이들. 살아남기 위해 빠르게 적응해야 하는 사회도 맞지만 조금은 더 천천히 갈 필요도 있다. 버린 꿈을 현재의 삶과 격리하지 말고, 상자 안에 고이 접어 외면해두지 말고 충분히 슬퍼해야 한다. 선택이야 물론 달라질 수 있다. 상황과 여건에 맞게 고민할 수 있다. 다만 너무 빠르게 적응하면, 본인이 그때 그 시절 왜 그렇게 열정적이었고 힘을 냈는가를 잊을 수 있다. 그렇게 보내기엔 한참은 아쉬운 세상이다.


 고집스레 지켜낸 세계는 온전히 그녀만의 시간이었기에. 삶을 지탱하는 기둥을 하나씩 빼면서도, 미소의 세상은 그럼에도 행복했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소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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