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젊은 시절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anderer Jul 20. 2021

버틴 게 아니라 흘러가는 것

영화 '인생'

 요즘 들어 '세련되다'는 표현에 담긴 뉘앙스를 곱씹어보게 된다. 세련되다는 말은 어색한 데 없이 능숙하다는 건데, 말의 멋에 비해 품이 넓어서 다양하게 쓰인다. 사는 데도 다양하게 써먹게 된다. 음악이나 글, 사용처는 대중없다. 일하는 방식이나 태도에도 가능하다. 살아가는 동안의 크고 작은 요소들엔 쓸 수 있는데 세련되게 사는 건 잘 모르겠다. 세련된 인생이 가능할까? 처음 보는 환경이나 사람들에게도 곧잘 어색함을 떨쳐내고 스며드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부러웠다. 능청스럽게 행동하는 게 세련된 인생의 단면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일이든 생각에 시간을 들이는 나는 도저히 그런 사람들의 반응 속도를 따라가질 못한다. 내 앞에 놓인 삶은 투박하기만 하다.


 영화 인생은 푸구이의 일대기를 그린다. 푸구이의 이름은 부귀할 부에 귀할 귀를 썼다. 정작 그 뜻과는 다르게 이름은 도박 장부에만 가득 적혀 있었다. 그럼에도 푸구이는 폐인이 되어 무너져 내리지 않았다. 주어진 환경에서 그저 적응하며 살아남았다. 환경에 적응하는 건 개인의 선택이 아니었다.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변하는 상황에 맞춰 행동한다. 푸구이가 하는 그림자극의 인형들 마냥 상황 속에서 연기할 뿐이다. 영화의 원제인 '활착'은 그런 점에서 보면 인생을 묘사하기에 알맞은 단어다. 활착은 옮겨 심거나 접목한 식물이 서로 붙거나 뿌리를 내려서 산다는 말이다. 푸구이의 모습을 보면 사는 일은 어떻게든 주어진 환경에 맞게 살아가는 일이라는 소박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인생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본다면 선택도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삶을 현미경으로 보면 B와 D사이의 C라던가,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던가 하는 말에 의미가 생길지도 모른다. 관찰할 수 있는 범위가 작아질수록 선택의 인과는 간명해진다. 지나치게 작거나 큰 세계는 우리의 행동이 끼칠 영향을 알 수 없다. 남의 인생에 대고는 그런 소릴 쉽게 뱉지만 자신의 것이라면 더욱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삶에 더해진 애정은 말로 직조할 수 있는 영역을 훌쩍 넘긴다. 지나온 시간과 앞으로 지날 시간을 계산하고 관찰하기 어려우니 선택은 무의미해진다. 우린 그저 눈에 망원경을 댄 채로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100m 앞을 보고 70cm 남짓한 보폭으로 발걸음을 떼야한다.


 국공내전으로 설원에서 군인들이 푸구이와 춘셩을 향해 떼로 몰려드는 장면이 나온다. 도망치는 두 사람은 이내 힘이 빠져 멈춰 선다. 시대는 개인의 선택과는 별개로 그냥 지나쳐간다. 가진 재주가 있다면 고비를 이리저리 타고 넘기겠으나 그마저도 선택으로 빚어지는 결과는 아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선택을 강요받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그는 그저 눈치껏 스며들었다. 다양한 신분으로 살았지만 푸구이의 얼굴은 그 모든 시간 속에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방탕하게 행동하는 부잣집 도련님의 위치에서 강제로 징집된 병사의 얼굴, 아버지의 모습까지. 신분과 관계에 상관없이 주변과 어울리는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어 신기했다.


 장예모 감독이 좋은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건 이야기를 취사선택하는 능력 때문이다. 장예모는 이야기를 세련되게 고른다. 평범한 소재를 가져와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야기를 이끈다. 이 영화도 오랫동안 중국 내에서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지만, 잘 골라낸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는 지점이 군데군데 있었다. 금속을 걷어가서 결과적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사했다는 내용을 묘사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건 나름의 시도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푸구이의 손자와 병아리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끝이 난다. 원작과 다르게 각색된 부분을 통해 어렴풋하게 시대의 고통을 다루는 세련된 방법을 볼 수 있었다. 저 시절의 고난은 사실이지만, 푸구이의 일생으로 들어가 보여준 이야기에 작위적인 모습은 없었다.


 투박하게 부딪혀 으깨져야 고쳐먹게 된다. 망원경으로 내다본 몇십 년 뒤 나의 모습은 지금과 무엇이 다를까. 여태 그래 왔던 것처럼 현재의 선택을 미래의 내가 비난하지 않았으면 한다. 어차피 매사 후회하게 될 것이지만 말이다. 주어진 상황과 환경에 적응하려는 노력으로 후회를 메워가는 것. 어쨌거나 활착은 인생의 과정이고 인생은 활착의 결과일 테니 말이다. 세련됨이 프로의 전유물이라면 사는 건 최대한 아마추어스럽게 살아내야겠다.


사진 출처 : IMDB 'Huo zh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