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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놀-잇-터' 제작기

<두 번째 기록>

by wanderer

*이 책은 세종시 청년센터 세청나래에서 진행된 <세종애(愛)착형성단> 사업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불온서적의 이름으로 나오는 첫 번째 책이기도 합니다.

기록출판 불온서적의 두 번째 인사

놀이터에서 우리는 별다른 이유 없이도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꼭 놀이기구를 타지 않아도 놀이터에 머물 수 있습니다.
놀이터에서는 돈을 내거나 그곳에서 무언가를 꼭 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목적 없는 공간은 사람을 가려 받지 않습니다.

올해 초, 저는 세종시 청년센터의 프로그램을 통해 책을 기획했습니다.
이 책은 놀이터라는 공간을 통해 지역과 청년의 생활상을 들여다보는 책입니다.
놀이터와 청년에 무슨 연결고리가 있는 걸까요?
사진 8.jpg 그네보다 발 구름으로 움푹 파인 바닥이 눈에 더 들어옵니다. 아이들은 여전히 건강합니다.

[놀-잇-터 소개]

놀-잇-터는 놀이터 공간 아카이빙을 통해 놀이터 공간이 갖는 의미와 확장 가능성을 탐구한 책입니다. 세종시의 다양한 놀이터 공간을 촬영했고, 인터뷰와 청년 작가 원고를 수록해 책자를 구성했습니다. 놀이터와 밀접하게 지내던 유년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놀이터라는 공간에서 왜 멀어지게 되는지, 청년에게 놀이는 무슨 의미인지를 탐구했습니다. 제목인 '놀-잇-터'는 청년에게 부재한 놀이라는 속성과 공간이라는 속성을 연결 짓고자 놀이터라는 이름을 비틀어 만들어봤습니다.


책이 만들어지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요새는 코로나19로 많은 시간을 집에서 보내고 있는데 종종 창문 너머로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노는 소리가 들립니다. 생각해보면 아이들은 모르는 친구든 아니든 놀이터에서는 편하게 어울리며 놉니다. 놀이를 매개로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는 이유 자체가 궁금해서 이를 알아가는 과정을 정리했습니다.

두 번째는 세종시라는 지역의 특수성입니다. 새롭게 지어진 도시에는 매일같이 건물들이 올라갑니다. 문득 이곳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도시의 어떤 모습을 기억할까 궁금해졌습니다. 아이들이 지역을 애착하기 위해서는 그럴 만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상상을 펼칠 그런 공간이요. 그렇지만 새로 지어진 도시에는 이유 없이 존재하는 공간이 없습니다. 그런 공간이 남아있기에는 비싼 동네니까요. 그래서 딱딱한 도시 속에서 그나마의 유대감을 쌓을 수 있는 공간이라면 놀이터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진 6.jpg

[본문 내용 중 일부]

(ⵈ) 몇 번이나 놀이터에서 놀다 다치고 깨졌던 기억들은 증발했어도 논다는 생각에 기뻤던 감정은 남아있는 걸 보면 놀이터는 분명 아이에게 특별한 공간이었던 것 같다. 놀이터라는 공간이 재밌는 만큼 커질 부모님들의 걱정도 이해는 간다. 아이들은 그 재미만큼 다쳐서 돌아왔으니까. 나도 크게 다쳤던 적이 있다. 우리집 아파트 놀이터에는 발로 밟고 넘어갈 수 있는 나무토막들이 있었다. 한 번은 그 나무토막에서 발을 헛디뎌서 미끄러지며 허벅지를 다쳤다. 부러지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여전히 그 흉터가 남아있다. 놀이터는 내 몸에 흔적을 남겼다. / 8p


무서운 형, 누나들이 그곳에 있었다. 어렸을 땐 보이지 않던 수북한 담배꽁초들과 쓰레기들이 모래밭에 즐비했다. 운이 좋지 않으면 놀이터를 지나가던 중에 붙잡혀 단돈 몇백 원이라도 뺏기기 일쑤였다. 몇 번씩 그런 상황을 마주하다 보면 그 장소 자체를 피하게 된다. 놀이터를 가로질러 가야 집에 더 빨리 갈 수 있지만, 굳이 돌아가는 길을 택하는 이유는 그런 마음이다. 좋아했던 공간을 떠나보내는 심정은 의외로 무덤덤했다. 그때는 그 선택의 결과가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저 무서운 상황을 마주치지 않고 피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훨씬 컸다. / 12p


놀이의 특징에는 자발성이나 재미, 공정한 경쟁 등이 있지만 '규칙을 지키는 것' 또한 놀이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규칙은 일견 놀이라는 말이 주는 자유로움과 해방감과는 동떨어진 특징처럼 보인다. 즐거움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규칙을 따져 묻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하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던 놀이는 규칙 속에서 채워지는 재미가 있었다. 역할극의 재미는 순전히 몰입에서 나온다. 세계에 몰입하는 힘은 규칙을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어깃장을 놓지 않으려면 규칙에 합의해야 했다. (ⵈ)중요한 건 같이 노는 친구들이 합의하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는 점이었다. / 72p


열린 공간이라는 점이 문득 생소하게 느껴졌다. 놀이터도 놀이라는 목적이 있는 장소이긴 하지만, 그곳에서 아이들이 놀이만 하진 않는다. 특정 목적을 위해서만 기능하는 공간이 아니라는 점은 사용자를 편안하게 만든다. 오히려 그 목적 없는 개방성이 심리적인 허들을 낮춘다. 놀이터의 물리적인 환경도 그렇다. 놀이터는 대개는 입구와 출구 없이 어디로든 들어오고 나갈 수 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끼리 이야기하기도 좋다. 어색해서 쭈뼛거리는 아이에게 친구랑 같이 놀아보라고 용기를 주면서 부모님들끼리도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공간은 그렇게 만남의 장소가 된다. 언제든 나가면 친구들을 볼 수 있는 장소. 서로 다른 생활의 교차로에 놓인 장소가 놀이터다. / 80p


청년은 자신을 활동으로 증명할 필요가 없다. 청년의 활동력이 그들의 특징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청년들은 모두가 그렇듯이 그저 한 시대를 특정한 시기로 지나가고 있을 뿐인 사람들이다. 세대에 따른 인식보다 시대 인식이 더 중요하다. (ⵈ)교류 공간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청년들이 늘어나는 것도 시대 흐름에 따른 변화라는 생각을 한다. 다원화된 세계 속에서 수많은 의제가 생겨났다. 그렇기에 예전보다 더 깊게 생각하고, 충분히 논의해야 한다. / 100p


재미로 무언가 해본다는 말에서 힘을 얻고, 조금은 더 가벼워진 마음으로 문제들을 바라보면 어떨까. 성공과 실패보다는 '노잼'이 더 견딜만하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무엇을 하든 가벼운 마음으로 다가가는 일. 어렸을 때 친구에게 먼저 손 내밀 수 있던 마음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가벼울 거다. / 104p


여태껏 청년들이 지역에 애정이 없었던 건 놀이터 같은 장소가 없어서 그랬던 걸지도 모릅니다. 이 지역에서 청년으로 살아가면서 느낀 가장 큰 갈증은 공간이었습니다. (ⵈ)세종이라는 지역을 기록해야 한다면 그 결핍을 이해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지역에 무슨 이유로 남게 되었는가, 무슨 이유로 떠나는가를 다양한 자리에서 고민하고 이야기해왔습니다. 매번 속 시원한 대답은 없었습니다. 놀이터를 촬영하고 기록하면서는 기존과는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뚜렷한 목표나 목적의식 없이도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없어서 그런 것 아니냐는 생각은 처음이었습니다. / 136p

사진 9_땀범벅 놀이터.jpg
사진 11_번암어린이공원.jpg
사진 12_번암어린이공원.jpg
놀이터는 옛날보다 훨씬 깨끗하고 친절한 공간이 된 것 같습니다.

[제작 후기]

낯선 환경은 생각하는 힘을 길러줍니다. 제가 지역의 특징이나 살아가는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여전히 이곳이 낯설기 때문입니다. 낯선 곳에서 적응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관찰해야 합니다. 노을을 보기에 좋은 장소라든가 적당히 경사져서 산책하기 좋은 루트는 알아두면 조금은 사는 일이 즐거워집니다. 일상을 채우는 사소한 의미들은 공간에 담깁니다. 그런 측면에서 놀이터의 의미는 모두에게 비슷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인 의미들을 더한 공간에는 각자의 애정을 더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저는 놀이터처럼 삐댈 수 있는 장소가 놀이터를 제외하고도 더 늘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인 문제로 현실가능성이 0에 수렴하는 아이디어지만 그래도 필요합니다 그런 장소는.


다양한 방면에서 지역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역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해석하고 풀어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현상에서 더 주목하고 관심 가져야 할 부분은 지역의 창작자, 단체, 기업, 기관이 만들어내는 독자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석은 관성적인 삶, 습관이나 패턴에서 벗어나 생존 환경을 0에서 다시 고려해보는 것입니다. 거주하기에 타당한 조건인지 따지는 문제와는 조금 결이 다릅니다. 객관적인 정보들을 주관적으로 사유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살아가는 모습이야 비슷하게 보일 수 있어도 삶의 이유와 방법은 제각기 다릅니다. 지역을 선택한 이들에겐 저마다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궁금해하는 일이 정주 환경을 개선하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만들면서 부족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아쉬움이 주렁주렁 매달립니다. 작가님들께 원고를 부탁할 때는 호기롭게 이야기했지만 제 능력은 재빠른 수용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더 나은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잘 쓰는 사람들 옆에 더 오래 붙어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이 도시에 더 많이 남았으면 합니다. 이름을 세종이라 지어두고 정작 무언가 쓰는 사람들의 삶은 너무 돌아보지 않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글에는 힘이 있는데 힘없는 작가들은 다들 다른 곳으로 떠나갑니다. 각자의 글이 책이라는 형태로 빚어지지 않더라도 다양한 그릇의 근간이 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 도시가 책 만드는 일에도 관심을 좀 더 가져줬으면 좋겠습니다.


웹 공유용 주소 : 놀-잇-터

사진 출처 : 커버) 남산 어린이 놀이터 사진(©서울특별시)

*서울사진아카이브 사이트에는 서울시의 오래된 멋진 사진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한번 들어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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