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다큐멘터리 '세상 끝의 집 -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 3부작
흔치 않은 경험인데 유튜브 알고리즘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 생겼다. 썸네일에 이끌려 홀린 듯이 찾아가고 찾아오는 세계가 유튜브라지만 이 영상은 아니었다. 썸네일 이미지의 채도보다는 명도가, 이미지보다는 텍스트가 눈에 담겼다. '고독과 침묵, 영원의 진리를 향한 구도의 길 <세상 끝의 집 -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 최근에 저런 비슷한 내용의 영상을 시청한 적이 없는데 목록에 떠오르는 것이 기이했다. 이것도 이유가 있겠거니 싶어 눌렀는데 보는 내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의미를 찾거나 물을 필요가 없었다. 생각을 하지 않고 보는 일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냥 보이는 시간과 사건을 그대로 눈에 담았다.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은 침묵이 일상인 공간이다. 침묵이 자연스럽다는 사실이 주는 묘한 몰입감이 있었다. 그 상황을 함께 따라가게 하는 다큐멘터리의 선택이 아주 탁월하다. 흥미롭게도 이 다큐멘터리에는 내레이션이 없다. 실은 나도 이 다큐멘터리에 내레이션이 없다는 사실을 한참이나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중요한 요소가 배제되어 있음에도 이 영상은 다큐멘터리로서 자연스럽다. 아주 가끔씩 수사들이 수도원에서 내려와서 산책을 하며 건네는 말과 한국어 교육 시간을 제외하면 목소리도 듣기가 어렵다. 밭을 매고, 빨래를 돌리고, 설거지를 하고 들릴 듯 말 듯 경을 읊조리는 소리 뿐이다.
내레이션이 배제된 다큐멘터리라는 점에서 이 영상은 시청할 가치가 있다. 일반적으로 내레이션은 다큐멘터리에서 영상의 이해를 돕는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내레이션은 또한 창작자의 주관이 담겨 있는 다큐멘터리의 의지다. 목소리의 형태로 연출자의 의도를 시청자에게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수도원을 그린 다큐멘터리 속에 내레이션이 배제되어 있는 건 당연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카르투시오 수도원의 주된 일과가 침묵을 지키는 생활이기도 하거니와 그 화면 밖의 목소리가 다분히 상징적으로 느껴지는 면도 있었으니까. 명명백백한 길이 보이는 상황에서 목소리를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화면 속의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전지한 목소리(내레이션)의 배제로 영상이 더욱 깊어졌다. 대신 자막은 종종 소박하게 화면의 구석에 새겨진다. 에피소드를 구분하는 챕터의 테마나 구절은 투박하다. 정직하고 올곧은 글씨체로 적힌다. 선언이자 맹세, 의지의 표현은 행동으로도 볼 수 있지만 문자로 적히면서 의미를 더한다. 들릴 듯 말듯하게 속으로 되뇌는 목소리에는 무엇이 담길까. 들을 대상이 보이지 않는 독백은 자신에게 거는 주문 같기도 하다.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자연의 모습은 성나지 않았어도 충분히 동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나뭇잎도 흔들리고 풀잎도 흔들리고 구름도 흔들리는 것만 같다. 빠르게 걸으면 또 걷는 대로 흔들린다. 발걸음이 위아래로 움직이니 세상만사가 리듬을 갖고 흔들린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몇 발자국 떨어져 영상으로 타인의 행동과 움직임을 바라보니 세계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 감상도 참 기묘했다. 나는 보통 어딜 가면서 꼭 귀로는 노래를 들으면서 간다. 눈으로는 위아래로 흔들리는 리듬을 보고 두 귀로는 좌우로 흔들리는 리듬을 듣는다. 움직임이 끝나는 자리에 멈춰서 던지는 질문은 끊임없이 속으로 파고든다.
한낮의 분주함보다는 늦은 밤에 만끽할 만한 영상이다. 침묵하는 모습을 좀 더 잘 들여다보려면 주변도 조용해야 좋다. 광막한 침묵 속에서 리듬이 느려지면 작은 박동 하나하나에 생각을 들여 넣기 좋다. 이런 사유의 시간에는 꼭 결과를 만들어내지 않아도 된다. 마음속에 지나가는 느낌 하나하나에 감을 곤두세우고 받아들이면 편안해진다. 다른 삶의 형태를 보면서 이해의 저변을 넓혀가는 일이 자연스러워진다.
*첨부할 사진을 찾으면서 KBS 1TV에서 했던 다큐멘터리의 확장판 영화가 있는 걸 알게 되었다. 이 또한 어떤 형태로 나와있는지 궁금해진다.
**유튜브에서 보기 : <"세상 끝의 집 -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봉쇄수도원 카르투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