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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derer Nov 19. 2018

굳은 믿음과 굳어버린 마음 속

영화 '모스트 원티드 맨'

 우리는 관성에 녹아 상상을 꺾으며 살아간다. 안정된 습관 속에 세계는 고립된다. 평범한 일상은 무척이나 지루한 일이 되었다. 일상은 일상이라 안전해진다. 평범한 일정들 안에서 변수가 만들어지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어쩌면 일상이 상상을 주저앉히기에 안전해지는지도 모른다. 무릇 안전은 안정 위에 만들어지니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보기보다 사이렌 소리를 들을 일이 없었다. 사이렌 소리는 일상을 깨트린다. 구급차가 내는 것이든 경찰차의 것이든 그렇다. 사이렌은 적막을 깨고, 깨진 적막은 불길한 상상으로 메워진다. 예민하게 받아들여 굳이 핸드폰 자판에 손을 가져다 대지 않아도 그 짧은 순간에 일상은 너무도 쉽게 어긋난다. 사이렌, 평탄한 항해를 막아 세우던 파국의 노랫소리처럼.


 아니다. 사이렌의 노랫소리는 경고였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안락에 취해 규정된 길을 가지 않는다는 경고. 일상을 보전하려면 그 소리를 들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호기심만이 상상의 영역인 것은 아니다. 상상은 실패와 불안, 미래를 대비하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다. 미지의 존재는 위협이다. 상상으로 불안을 채워야 안전해진다. 최악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힘이 우리가 가장 안전해지는 길이다. 그러니 오디세우스는 선원의 귀를 밀랍으로 봉인하되, 자신만은 노랫소리를 들었던 것이 아닌가. 영리한 오디세우스는 선장의 몫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본인의 임무에 대해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 사내다. 그는 그 모두와 함께 돌아가고자 했다.

 단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로.


 모든 길을 열어두고 생각하는 일은 모든 길을 닫아둔 것이나 다름없다. 열린 결말은 실상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만 흐른다. 당신의 생각은 갇혀야만 풀려나고, 열리면 닫힌다. 닫힌 생각의 끝은 무척 단순한 진리로 맺어진다. 보고자 하는 길을 생각할 것이고 생각한 대로 보게 된다. 보고자 하는 대로 보이지 않으면 생각을 바꾸기보다는 상황을 바꾸려 한다. 그 편이 훨씬 쉽다. 내가 틀렸음을 인정하고 생각을 바꾸는 일보다는. 어떤 상황에선 짐작과 확신은 같은 의미로 쓰인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안갯속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그곳에 땅이 있으리라 확신해야만 한다. 추측은 확신이 되고, 확신이 결과를 바꾼다.


 정보를 만드는 건 사람들이다. 소문과 사실이 혼잡하게 날뛰어 벌어지는 각축장에서 정보가 태어난다. 그러니 정보원들은 사람으로 사람을 얻어야 한다. 사람이 이어져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만든다. 장점과 단점, 특징, 성장 배경, 사상과 가치관이 만들어낸 개개의 존재는 예측할 수 없는 변수를 만들어낸다. 예측하기 힘들어도 사람과 사람이 붙으면 그 사이는 끈끈하다. 이들은 우리의 일상 속에 녹아든다. 친구, 형제, 아버지 혹은 연인이 되어 시간을 들인다. 그 시간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 어떤 날카로운 사람도 시간 앞에 무뎌진다. 사람이 무너지는 건 결국 본인의 말과 글 때문이다.


 군터 바흐만은 정보원이다. 그는 사람으로 사람을 막는다. 규칙을 무너뜨리는 이들도 사람이나, 규칙을 세우는 이들도 사람이다. 그는 노련하다. 사람을 대하는 방법이라면 도가 텄다. 인간은 강하지 않다. 어떤 상황 속에 있든 그의 방식은 확실하게 통한다. 경험을 통해 확신하고 확신을 통해 행동한다. 큰 그림은 어그러지지 않는다. 바뀌는 건 방식일 뿐이지 아이디어가 아니다. 원하는 결과에 이르는 방법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증오받는 자, 오디세우스. 선장 오디세우스는 사이렌의 소리를 들었다. 본인의 몸을 묶어둔 채로 홀로 감당해냈다. 하나의 큰 목적만 두고서 그는 혼란 속에 본인을 내던졌다. 덤덤하게 세계를 지킨다는 말을 통해 본인의 일을 설명하는 군터 바흐만의 모습에서 오디세우스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세계라는 단어의 크기에 비해서 군터 바흐만의 발화는 무척 소박했다. 묵직한 대의를 마음속에 품고 일하지 않아도, 그 일이 개인의 명예를 위하는 일이 아니어도 그는 그 목적을 잊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세계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가짐은 화려하지도 않고 묵묵히 실패를 감당하는 일이다. 실패한다고 포기해버리면 목적은 영원히 이룰 수가 없다. 간단한 이유다. 보다 안전한 세계를 위해서. 안전이라는 의제와 세계라는 기준, 간명하기에 이룰 수 없는 삶.


사진 출처: 다음 영화 '모스트 원티드 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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