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관상'
오랜만에 다시 브런치에 글을 올리게 되었다. 그런 만큼 소재가 무척이나 고민스러웠다. 영화 보는 일도 내키지 않았고, 다큐멘터리를 보는 일도 내키지 않았다. 이것저것 글감으로 쌓아뒀던 소재들을 다시금 풀어헤치는 일만 반복했다. 그러다가 문득 잡힌 것이 이 영화였다. '알쓸신잡'에서 세조와 단종에 대한 이야기를 했기도 하거니와, 한 번은 꼭 이렇게 글로 감상을 기록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영화였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지금 글을 잡게 되었다.
관상에 대한 관심은 사실, 나를 좀 더 정확히 알아가고자 했던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성격에 대한 책이나 사주에 대한 책도 접해봤지만, 관상은 유독 특별했다. 특별한 점이라고는 없는 얼굴에도 개개의 이유를 대어 의미를 만들어가는 일이니까. 그렇게 얼굴을 읽어 생의 흐름을 볼 수 있다는 것에 매혹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생의 흐름, 누군가는 그걸 '운명'이라 부른다. 운명을 이야기하는 일은 하나도 확신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나름의 잣대를 세우는 일처럼 느껴졌다. 기준부터가 불확실하지만 운명은 그 이름 자체로 매력적이지 않던가. 운명에서 '운(運)'은 옮긴다. 움직인다. 나른다는 의미이고, '명(命)'은 목숨이고 생명이다. 한 사람, 혹은 하나의 풀뿌리, 약동하는 동물. 이 모든 생은 무겁다. 저마다의 무게를 가지고 끈덕지게 얽혀있다. 나를 통해 이어지는 목숨들이 얼마나 많던가. 다만, 사람들은 운명을 짊어지고 가지만은 않는다. 한 사람의 얼굴을 읽는 일은 그것을 어떻게 다뤄왔고 앞으로는 어떻게 다룰 것이냐에 대한 문제다. 그런 이유로 김내경은 관상을 이야기하며, 걸음걸이와 행동거지도 읽는다. 그는 그런 식으로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의 인생을 보아왔다.
역적의 자식으로 몰락한 김내경은 본인의 운명을 수긍했다. 화려하게 살던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한채, 그저 살아있다는 사실에 만족할 뿐이었다. 그의 삶을 바꾼 것은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었다. 환경이 변했고, 그는 그를 받아들였다. 그의 아들 진영은, 본인의 재주를 마음껏 펼칠 수 없는 환경이 불만이었다. 김내경은 그의 아비가 그러했듯, 재주가 화를 불러왔음을 아들을 보며 직감했을 것이다. 재주는 있으나, 삶이란 결국 그 재주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관상쟁이였고, 한 사람의 아버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들의 미래를 짐작하면서도 말릴 수 없었던 것이다. 예리한 촉으로 비극을 짐작하면서도, 그것이 아들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그대로를 바라볼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아버지에게 너무 아픈 미래니까. 차라리 본인의 직감이 틀리기를 기원하며, 아들을 보내준 게 아니었을까. 주관과 감정이 섞이지 않았다면 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정이 없다면 삶은 굴러가지 않는다. 삶이 굴러가지 않으면, 운명은 사람을 주저앉힌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주저앉은 사람은 만족했는데 무엇이든 바꾸려 했던 사람들은 비극을 맞았다. 파도가 치는데, 그에 몸을 실은 사람은 파도를 타고 넘었고 헤엄치려 한 사람들은 가라앉아버렸다.
이렇게 바라보니, 운명이란 말은 묘하게 예언과 맞아떨어지는 듯하다. 원하든 원치 않든 예정된 하나의 결론만을 보여주는 것. '그림자 자국'이라는 책에 나오는 예언자는 그래서일까, 예언을 폭력이라 불렀다. 재해가 아닌 폭력. 폭력은 주체와 대상이 명확하다. 사람들이 예언에 대해 물으면, 예언자는 결과만 말해줄 뿐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떤 마음이나 기분인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오로지 일방적인 전달만 있을 뿐. 그러니, 폭력일 수밖에 없다. 예언은 결국에 미래의 일부만 보여줄 뿐, 그것을 맥락으로 설명하지 못하니까. 납득할 수 있는 미래는 시시하고, 납득할 수 없는 미래는 기괴하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은 오히려 버려진다.
대개의 예언자들은 미래를 보는 일에 대한 대가로 장님들이거나, 장님이 될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많다. 미래까지 볼 수 있는 힘은 한낱 인간이 감당하기에 너무나도 큰 권력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예언자들의 눈을 빼앗는 것이 아닐까? 만약에 예언에 대한 죗값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각'이 아니라 '목소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관상은 결국 개인을 통해, 집단을 보는 일이었다. 개개인의 얼굴을 살펴본 결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비슷하게 행동을 한다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보니 김종서 영감의 부하들은 유독 '호랑이'스러웠고, 수양대군의 부하들은 유독 '하이에나'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이 분은 유독 호랑이스러운 느낌이 강했던 것 같다. 강직하고, 휘지 않기에 부러지는. 그래서 영화의 끝이 더 극적이고 강하게 뇌리에 박혔던 것 같다. 한 마디 한 마디의 말보다 강력한 설득은, 하나의 이미지였다. '저 사람은 저런 성격일 것이다'하는 착각, 혹은 편견. 이런저런 말로 설득하지 않아도 얼굴만 보고 판단해버리기 때문에 생각은 훨씬 빠르고 효율적이다. 영화 속의 많은 사람들을 빠르게 이해하면서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착오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영화를 보고 나니, 운명을 바꾸겠다는 말이 내겐 오만처럼 들렸다. 오히려 운명을 '사겠다'는 말이 적합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운명을 산다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무엇을 줘야 할지도, 무엇을 얻어낼 수 있는지도 모른다. 온전히 모든 일을 거쳐보고 나서야 스스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가늠이나 해볼 뿐이다. 다 살아봐야 알겠지만은, 사는 일이 꼭 답을 안다고 해서 정답으로만 풀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가끔은 답을 알고, 과정도 알고, 모든 상황을 아는 입장에서 다시 문제를 푸는 데에도 이 문제의 답이 다른 것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논리와 감정이 충돌하는 때에 내 선택은 지극히 감정적이었다. 아는 걸 이해하기 위한 무던한 노력. 논리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감정으로 이해해보려는 시도. 운명을 사는 일은 내게 그런 의미였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유독 헛헛한 감정에 빠져드는 영화였다. 목적을 잃어버린 삶을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고통을 느끼게 하는 영화였다. 그 깊은 감정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힘이 드는 영화였기도 했다. 물으면 물을 수록 더 큰 질문과 마주하게 되는, 고통스러움과 즐거움이 반복되는 이 기묘한 기분. 명쾌한 해답을 바란다면 더없이 괴로울 뿐이다. 으레, 인생이 그렇듯이.
사진 출처: 다음 영화 '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