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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derer Oct 27. 2023

생은 선택하는 것, 선택에 낙담하지 않는 것

영화 '던전 앤 드래곤: 도적들의 명예'

 판타지 영화에서 가장 가슴 설레는 장면이 있다면 중대한 모험을 앞두고 팀원을 모집하는 순간이다. 얼떨결에 여정을 떠난 프로도 일행을 브리 여관에서 맞이하는 아라고른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얼굴이 채 반도 보이지 않는 후드, 길게 뻗은 담뱃대에서는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묘한 긴장 속에서 프로도 일행은 미지의 수호자를 맞이한다. 위험을 인지한 아라고른은 기지를 발휘해 재빠르게 프로도 일행을 피신시키며 위대한 여정의 서막을 연다. 팀원을 모집해서 하나의 임무를 수행한다는 점으로 보면 하이스트 필름 또한 그런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열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으로 깔끔하게 캐릭터성을 잡으면서 관객에게 인물을 소개한다. 에피소드에서 에피소드로 이어지면서 역할군을 납득하게끔 만든다.


 팀원 모집 자체에서 이미 재미가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 역할군 때문이다. 모험을 유기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 각자가 해야 하는 몫이 정해져 있고 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과 기지 발휘가 주된 재미 요소다. 해묵은 갈등의 골 같은 건 없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특정한 목표만 달성하면 되는 정도로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기에 무겁지 않다. 가볍게 나아가야 과정에서 속도가 붙는다. 하이스트 필름의 경우에는 따지고 보면 도둑질을 하는 내용이다 보니 깊게 따질수록 불리해지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던전 앤 드래곤 영화의 부제는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도적들의 명예라니. 도적들에게 잃어버릴 명예랄 게 있을까?


 삶은 모순투성이다. 딸과 함께 도둑질에 나서게 된 에드긴의 처지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소시민의 삶을 살아왔지만 생활을 유지해 나가기엔 빡빡했고 한 순간의 실수로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 연민이 들기보다는 모순처럼 느껴진다.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아버지는 실수를 두고두고 복기하며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기 위한 여정을 나선다. 흔하디 흔한 이야기지만 그만큼 매력적이다. 실수를 바로잡고 싶은 마음은 모두에게 동일하니까. 실수를 바로 잡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함께하게 된다. 완벽하지 않아서 다잡으려는 시도가 이어진다. 선택들이 이어지면 삶이 된다. 다만 현실 세계였다면 되살릴 수 없는 사람들을 판타지 세계 속에서는 살려볼 수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영화에는 부활의 석판이라고 하는 강력한 마법 유물이 등장한다. 이 부활의 석판을 사용하면 망자를 되살릴 수 있다. 에드긴의 목표는 오로지 부활의 석판이다. 그것만 있으면 자신의 과오를 만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를 돕는 동료들은 저마다의 목적으로 동행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에드긴의 여정을 따른다. 부활의 석판을 되찾는 과정에서 각자의 목표를 달성하는 식이다. 부활의 석판을 되찾아 망자를 되살리려는 에드긴의 행동은 개인적인 그리움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속죄에 가깝다. 단 이 작품이 아니더라도 많은 구전설화에서 죽은 사람을 살려내려는 행동의 기저에는 속죄와 연관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어떤 죄가 있어서 그렇다기보다는 그 여정 자체가 일종의 구원을 바라는 행동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서사의 깊이는 다르지만 악인이 회개하는 구조는 다양하게 활용되어 왔다. 게임이나 영화 등 매체를 가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게임의 경우에는 인물이 속죄의 길을 걸어가는 과정 전반에 깊게 몰입할 수 있게끔 하는 장치들이 설정되어 있어 훨씬 감정의 진폭이 크다. 폭력의 굴레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인물, 무법천지의 세상을 살아왔던 이가 수단을 내려놓고 목적으로 향하는 모습에는 묘하게 가슴이 뜨거워지는 지점이 있다. 어찌할 수 없는 흐름 속에서 그저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쳤을 뿐인 한 사람의 인생사를 마주하는 건 버거울 때가 있다. 나의 실수를 마주하는 것도 부끄러운데 타인의 실수 또한 오죽할까. 하지만, 실망과 실수를 반복하며 무뎌지기도 관대해지기도 하는 것이 어울려 살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숱하게 실망시키고 위로하면서 영화는 클라이맥스로 다가간다.


 이 영화는 '던전 앤 드래곤'이라는 TRPG 게임을 원작으로 두고 있다. TRPG에서 플레이어는 캐릭터의 설정을 만들고 그 설정에 기반해 행동한다. 말투, 행동, 특정 선택들의 이유 등 그 캐릭터가 할 만한 행동을 해야 한다. 또한, 캐릭터가 특정한 행동을 할 때 플레이어는 20면체 주사위를 굴려 판정을 본다.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정해져 있는 구성을 따라가기보다는 함께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운이 좋아서 연달아 판정에 성공할 수도 있지만 실패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치명적으로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특별히 다시 던질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기도 하지만 흔하진 않다. 만회할 수 없는 실수는 특히 여기서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누구 하나 특출 나게 강한 사람은 없고 실패의 책임은 파티원 모두에게 영향을 준다.


 TRPG에서 중요한 건 실패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선택에 따르는 경과를 감당하며 다음 발걸음을 옮겨야 게임이 진행된다. 자신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실패를 용납하기 어려운 시대에 이런 과정은 의미가 있다. 게임 속에서 실패나 실수 의도치 않게 발생다. 확률의 신이 항상 나의 편일 수는 는 일이니까. 인생을 그 자체로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 불확실성을 인정해야 한다. 적어도 이 영화만큼은 그런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플랜 C지 계획을 준비하는 사람인 에드긴이 동료를 설득하는 과정은 구체적인 방법론보다는 실패의 가능성을 수용할 때 비로소 힘이 생긴다. 생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의 시간이 다가올 때 우리는 승리를 거머쥘 수도, 쓰라린 패배를 맛볼 수도 있다. 영화는 그 조차도 수용하고 긍정하며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에게는 다음 라운드가 있다. 막힌 길을 보고 다음 방법을 고민해 보자. 생은 선택하는 것이니까. 선택의 무게에 짓눌려 결과를 낙담하지 말자.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던전 앤 드래곤 - 도적들의 명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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