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에세이Q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anderer Jan 03. 2024

심장에 가까운 소리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역사를 화면에 되살려내는 일은 무척 어려운 작업이다. 필연적으로 사람들이 이미 아는 내용을 어떻게 보여줄 것이냐 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철저한 고증에 입각하면서도 기록의 여백을 파고들어야 한다. 글자로만 상상하기 어려운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역사 속 사건의 인과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언제였는지를 기억한다. 인과로 기억하는 모습, 활자 속에 박제되어 있는 옛사람들의 모습은 생동감이라곤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어야 그림이 그려질 텐데 몇 가지 단서로는 어림짐작할 뿐이었으니까. 영상언어로 섬세하게 그려내는 역사적 사건들은 인물들의 심리와 행동을 묘사하기에 텍스트를 훨씬 더 풍부하게 읽어낼 수 있다.


 7년 간의 전쟁은 지리멸렬하게 지속되어 오고 있다. 지옥 같은 상황 속에서 삶을 논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재난이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확실한 선언이다. 이미 이긴 전쟁 같아 보일지라도 적들이 모두 사라지기 전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영화에서 집중하고자 했던 건 이 지점이었던 것 같다. 기나긴 전쟁의 피로감을 상세하게 묘사하는 데 공을 들인다. 끝없는 긴장 속에서 무뎌지는 건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 마음이 절절히 느껴졌다. 보이는 모습이 그러니 인물들의 행동에 설득력이 더해진다. 불필요한 인명 피해를 줄이고자 적당히 타협하려는 명나라 도독 진린의 태도 또한 납득이 간다. 의와 불의 이전에 실리를 따진다.


 노량에 나오는 왜군 장수, 시마즈 요시히로는 3부작 중에서는 가장 적수답게 그려졌다는 생각이다. 명량과 한산에 등장했던 왜군 장수들은 복잡한 이해관계없이 순수한 적의를 보여서 다소 평면적인 악역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번 작에서는 훨씬 더 입체적인 모습을 보인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전장으로 나서는데 전투에서도 전략적으로 행동하는 면모가 가장 두드러졌던 것 같다. 1, 2편과 다르게 해상전에 많은 시간을 들이다 보니 더 상세한 묘사가 가능했다는 점도 크다. 전투는 짙은 어둠이 깔린 밤에 시작해 서서히 해가 밝아오고 동이 틀 때까지 이어진다. 육중한 군함이 부딪히고 포탄에 나무 파편이 날아다닌다. 거리가 좁혀지면서 육박하는 적이 느껴진다. 노량의 바다에서는 전략과 전술보다는 결연한 의지로 시선이 모아진다.


 삶은 죽음의 지연일 뿐인가? 지연된 죽음이 생의 의미인가? 전쟁의 끝은 지옥에서의 생존이 아니다. 생활을 꿈꾸기 위해서는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비록 그 일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희생하게 되는 것일지라도. 장군은 전사자 명부를 죽 훑어내린다. 7년 전쟁 동안 전사한 이들의 이름을 태우며 전의를 다진다. 잊어야 하는 미래와 잊고 싶지 않은 과거 모두 불에 태운다. 그렇기에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낸 결전은 이전과 다른 절실함으로 다가온다.


 이상하게 명량이나 한산과 같은 영화는 보면서 여타 전쟁 영화와는 다른 느낌이 든다. 한산과 명량은 굉장히 긴밀했다. 관객 입장에서 보기보다는 국민의 입장 같았다. 그런데 노량 해전은 이순신 장군의 전사라는 사건의 충격이 워낙 컸다 보니 이를 어떤 전투였는지 생각해 볼 계기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인지 전투 자체가 상당히 낯설게 느껴졌다. 구태여 감정적으로 굴지 않아도 타인의 삶을 지켜내기 위한 발버둥은 그 자체로 눈물겨웠다. 전사한 이들의 희생을 기리고, 남아있는 이들의 오늘을 지키기 위한 분투. 북채가 부서져라 북을 치는 장군의 모습은 그래서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는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보다 심장에 가까운 소리로.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매거진의 이전글 생은 선택하는 것, 선택에 낙담하지 않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