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래빗 홀'
베카와 하위는 아들을 사고로 잃었다. 두 사람은 일상을 살아간다. 아들 대니를 잃기 전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베카는 천천히 아들의 흔적을 지워나간다. 아들이 입던 옷들을 기부하고, 아들이 그렸던 그림을 치워두고, 아들이 갖고 놀던 장난감들도 정리한다. 집도 팔고 나서 어디론가 이사하기를 원한다. 하위는 아들의 흔적을 지워가는 베카의 행동이 탐탁지 않다. 그는 한밤에 몰래 거실로 나와서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던 아들의 영상을 보면서 기억하려 애쓴다. 회사에 있는 그의 책상에는 아직도 아들과 함께 있던 사진이 놓여있다.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일상을 살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
점점 아들의 흔적을 지워가는 베카와 아들의 흔적을 통해서 아들을 기억하려는 하위는 결국에 충돌한다. 둘은 서로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만약에' 개를 데려오지 않았다면, '만약에' 전화를 받으러 들어가지 않았다면, '만약에' 문을 열어두지 않았다면, 아이는 살아있을 텐데. 그럴 수도 있었을 텐데. 어떤 다른 평행 우주에서 아이가 살아있을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슬픔이 직접 내 마음에 닿았던 부분은 굉장히 사소한 순간들이었다. 이를테면 베카가 사탕을 사 달라는 아이에게 사탕을 사주지 않는 엄마와 다투고 나서 차에서 흐느끼는 그런 장면들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고, 그냥 지나쳐가면 되는 일이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질 않는 것이다. 어쩌면 그녀에게 그런 상황이 있었을 것이다. 아이와 함께 마트에 갔는데, 사탕을 사주지 않았을 것이다. '대니, 너 어제도 사탕 먹었잖아. 그렇게 자주 먹으면 이빨 썩어. 안돼.' 그냥, 이렇게 이야기하는 베카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음껏 슬퍼하고, 그리워해도 끝내 잊히지 않는 이가 있다. 흔적을 없앤다고 사라질 것도 아니고, 다른 일에 몰두한다고 기억이 나지 않을 것도 아니다. 직접 보고, 만지고, 쓰다듬고 냄새를 맡고 이야기를 들려줄 수는 없어도 마음 한 구석에는 남아있다. 아무리 오래되고 시간이 흘러도, 어떤 형태로 기억하든지 말이다. 그리움의 무게는 각자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이내 털어내고 살아가겠지만 그것이 그에게 슬픔이 없다는 말이 되지는 않는다. 누구에게나 슬픔은 있다. 누구에게나 그리움은 있다.
'만약'이라는 가정은 때때로 나를 슬프게 한다. 가끔 '만약에' 누군가가 내 곁에 없다면 어떤 느낌일지 생각해볼 때가 있다. 참 신기한 게, 슬픈 영화를 본다거나 하는 일로도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 마음이 이럴 때에는 강하게 반응한다. 누군가의 부재를 상상하는 것은 굉장히 사소한 일에서 슬픔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그 사람과 자주 가던 곳에서 항상 하던 행동을 할 때에 빈 자리를 느끼는 것에서 슬퍼진다. 엄마는 항상 글씨를 예쁘게 쓰셨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손수 내 책가방과 필통, 공책에 이름을 써주셨다. 엄마의 필체에는 스타일이 있었다. 고등학생 때였나, 내가 직접 이름표를 공책에 붙이고 내 손으로 이름을 쓰려고 하다가 문득 생소함을 느꼈다. 예전에는 항상 엄마가 내 이름을 써주셨는데, 어느새 보니 내 이름을 내가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냥 그런 생각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엄마 글씨체로 쓰인 내 이름을 볼 수 없게 되는 때가 오겠지.' 하는 그런 생각이었다. 그 생각을 했을 때처럼 슬펐던 때가 없었다. 그 순간이 언제가 되었든 오고 있다는 것이 무서웠고, 삶의 흔적이 사라진다는 것이 서글펐다.
(영화를 보고 나서 유튜브에 '래빗 홀'을 쳤다가 이 노래를 보게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노래를 듣다가 눈물이 날 뻔 한 걸 참느라 끙끙거렸다. 아마도 그리움에 멜로디가 붙어있다면 이런 음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래빗 홀'
영상 출처: https://youtu.be/WjmIJnbtJ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