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푸른 언덕을 좋아했다.
그 곳에는 소년이 쉴만한 그늘을 주는 느티나무가 무심히 서 있었고, 산들거리는 들풀과 들꽃들이 계절마다 색을 달리 하며 빽빽히 자리 하고 있었으며 언덕 높이만큼 가까워진 하늘에는 바람과 새들이 함께 어우러져 넘실거렸고, 무엇보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아랫마을 전경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귓볼이 빨갛게 될 정도로 달음박질 치며 올라가면 나무가 반겨주고 새들이 노래해 주었고 따스한 햇살이 눈부시게 내려앉았다. 푸른 언덕은 그의 친구였다.
이제 그 소년이 키가 한뼘 이상 커서 청년이 되어가고 있다. 아직은 그 언덕을 떠나지 않고 멀리 보이는 들판과 점점이 찍힌 집들 지붕을 눈에 새겨 넣고 있다.
그렇게 소년은 푸른 언덕 위에서 키도 마음도 자라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그 소년은 이제 이 곳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한다.
지루해진 것이다.
뺨을 간지럽히는 바람자락도, 느티나무의 안락함도, 지평선처럼 펼쳐져 있는 들판도 모두 소년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그 소년은 스물 즈음에 언덕을 내려왔고, 더 이상 그 곳을 올라가지 않았다.
청년이 된 그는 도시로 발길을 돌렸고 푸른 언덕은 까마득한 추억의 한 켠으로 돌아 앉고 말았다.
도시에서 그의 삶은 치열했고 바빴다. 마치 끝없는 쳇바퀴를 돌리는 것처럼 변함 없이 말이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했고, 1시간이나 걸리는 회사를 가기 위해 숨 막히는 아침 출근시간대 지하철을 견뎌내야 했다. 그는 남들도 다 하는 일인데 하면서 익숙한 듯 매일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숲을 보는 눈으로 사람들을 더 많이 보게 되었고, 언덕을 오르내리는 그 발로 버스와 지하철을 더 많이 이용하게 되었고, 늘 아름드리 나무에 기대어 있던 그 등짝에는 늘상 무거운 가방이 매여져 있었다.
그렇게 40여년이 흘렀다. 이제 더 이상 그의 얼굴에서 소년의 모습은 흔적을 찾기 힘들어졌고, 그의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 있음이 역력하게 보였다. 늘 일에 쫓겨 살았고, 가족을 챙기고 돈에 허덕이며 살아온 그의 어른 이후의 삶은 이렇게 많은 생채기를 주름 주름에 남기고 서서히 저물어져만 갔다.
그의 나이 70을 바라보면서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던 그 푸른 언덕이 불현듯 생각이 났다.
잊고 있었다고 하기 보단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던 그 곳.. 갑자기 그는 그 곳을 가야 한다는 강박적인 생각에 서둘러 그 언덕을 향해 홀로 떠났다. 그 순간만은 혼자이고 싶어서였기에..
고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옛날의 추억을 최대한 많이 떠올려 보기로 했다.
그 중에서도 언덕 위에서 지겹도록 보던 그 풍경들이 새록새록 보이기 시작했다. 느티나무도 보이고 꽃들도 보이고 구름과 함께 흘러가던 바람도 보이고 마을 집들, 떼지어 날아가는 새들.. 모든게 어제의 모습인양 그에게 새롭게 다가오고 있었다.
변한 것은 그의 모습 뿐이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어릴 적 소년이고 싶었는데 추억에 잠긴 눈을 뜨고 보니 눈에 걸려있는 건 주름진 그의 손과 도수 높은 안경 뿐.
그래도 좋았다. 얼마 후면 소년에게 그토록 익숙했던 그 푸른 언덕이 보여질테니까..
몇 시간을 달렸을까? 두번 째 갈아 탄 버스는 드디어 고향 마을에 도착하였고 그는 이제 그 언덕만 찾으면 될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주변 풍경이 너무 달라져 있었다.
우선 바람에 먼지가 풀풀 나던 동네 길은 모두 도시에서 많이 보던 회색 콘크리트 길로 바뀌었고, 마을 집들은 제법 도시 분위기가 나는 현대식 주택들로 자리 잡고 있었고, 무엇보다 가장 난감한건 그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그 곳을 향해 발길을 재촉하였다.
그 곳에는 느티나무가 있어야 했고, 늘 코 끝을 맴돌던 바람이 불어야 했고, 멀리 들판과 마을이 눈에 들어와야 했었다. 그래야 그가 찾던 그 푸른 언덕이 맞다.
하지만 아무리 찾고 찾아도 그 언덕은 보이지 않았다.
우선 가파른 언덕 길이 나와야 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마을 어디에도 오르막 길이 보이질 않는다.
고향 마을은 비록 그 모양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대로인데, 왜 그 언덕 길만 보이지 않은 걸까?
그 순간 화들짝 놀라게 만든 모습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대충 눈대중으로 그 즈음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제법 큰 건물 몇개가 가로 막고 있는게 아닌가?
군 단위 소속으로 만들어진 복합행정센터, 마을회관, 보건소, 면 사무소, 배움센터 등이 어우러진 현대식 신축 건물들이었다. 게다가 동네 사람들이 제법 많이 오가는 장소이다 보니 예전의 그가 지겹도록 오르내리던 그 길은 건물 뒷편 어딘가로 숨어버린 것이다.
겨우 언덕 어딘가로 올라가 보니 아름드리 나무는 찾아볼 수 없었고 먼 발치에 보이는 풍경은 더 이상 그가 찾던 그 모양이 아니었다. 마치 자신의 늙고 추해진 얼굴마냥 그 언덕도 변한 것이다.
이제야 알았다.. 지금의 그는 더 이상 소년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 푸른 언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제서야 깨달았다. 청년이 되면서 그토록 자주 찾았던 언덕을 더 이상 찾지 않게 되었을 때 자기는 이미 꿈을 잃어버리고 말았음을...
소년의 외면을 받아낸 언덕은 퇴색되었고 소년은 노인이 되어 그 옛날만 추억하고 있다. 갑자기 한 가닥 이슬이 그의 눈가에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