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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자정리 Jun 14. 2022

그가 내 아내를 아줌마로 만들었다.

아내의 해방 일지

누구나 한 번 쯤은 '나이가 들면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라고 되뇌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적어도 중년을 넘어선 나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모든 일이 그렇지만 아닐 것 같은 일은 꼭 일어나길 마련.


주말에 아내와 근처 백화점에 가서 점심을 먹기로 했었다. 무엇을 먹을지 한참을 망설이며 식당가를 돌았고, 결국 선택한 것은 소고기 샤브샤브. 돌다 온 사이 아까 없던 2팀의 대기가 그새 생겼다. 


딱히, 다른 곳을 가기도 애매해 대기를 걸고 나서 주변 매장을 어슬렁 거리듯 구경했다. 10분 남짓 후, 아직도 순서가 오지 않아 가게 앞 대기 소파에 앉았다. 소파에 앉은 채, 각자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나는 게임을 잠시 하고 있었고, 아내는 이내 유튜브 영상 하나를 보는 듯했다.  

'네, 그러니까... ' 영상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라디오 패널로 출연해 이야기를 나누는 영상이었던 것 같은데, 슬쩍 보니 그였다. 요즘 와이프가 푹 빠져있는 그. 구 씨(손석구 분). 구찌보다는 구씨라는 유행어와 관련 짤이 돌정도로 인기다.


나의 해방 일지 드라마 포스터 [출처: JTBC]


아내는 드라마가 회를 거듭할수록 심취했다. 작가의 전작이 마니아도 많고 인생 드라마라 치켜세우는 이도 많지만, 모두 다 한 목소리로 초반은 버텨라라는 농담 아닌 농담이 공공연했다. 그래서 아내도 적잖이 기대를 한채, 초반의 우울한 분위기를 버티고 보더니 말 그대로 드라마를, 주인공을 추앙하게 된 것이다.  


옆에서 가끔씩 동냥하듯 본 나로서는 전체적으로 우울하고 답답한 분위기가 썩 호감이 가지 않았지만, 신선했던 것은 사실이다. '추앙'이라니. 이 단어가 얼마나 낯설고 신선하던지. 거기에 슬쩍 해방이라는 단어까지 얹힌다.


주인공들의 대사 속에 추앙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난 내가 알고 있는 그 단어의 뜻이 맞는가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으리라. 얼마 전 한 브런치에서 작가의 단어 선택에 질투가 날 정도였다는 글을 보면서, 역시 진짜 작가는 다르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중간에 좀 띄엄띄엄 놓치긴 했지만 아내와 마지막 회를 봤다. 드라마를 보면서 느꼈던 공감과 서사가 부족해서인지 그저 내게는 독특했던 드라마였다. 하지만, 아내는 핸드폰 배경화면을 주인공 커플의 재회 장면으로 바꿀 정도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금방 끄겠지 했는데, 대략 1분이 넘어서는 것 같다.

작긴 했지만 아내는 유튜버 영상을 소리를 켠 채 보고 있었다.  


'자기야~ 소리 좀.'

아내에게 내가 말했다. 백화점이라 주변 소음이 있어 몇 발짝 떨어진 사람들에게는 영상의 소리가 들리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잠깐이 꽤 길어지면서 아내에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리가 켜져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었다.


아내가 웃으며 '참을 수가 없네! 하하'

점심을 먹기 위해 나온 터라, 이어폰 없이 나온 상태에서 그의 영상은 계속 보게 되었다며,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영상을 껐다. 간혹 지하철 등에서 소릴 켜고 영상을 보던 우리 내 아줌마, 아저씨를 보며 '왜 저래'라며 혐오했던 지라 더 머쓱해했다.


'구 씨가 아주 버려 놨네. 진정한 아줌마가 된 것인가.' 짧게 농담을 던졌다.


나이로 보면 누가 뭐라 해도 소위 아줌마다. 마음과 외모는 아닐지언정 사회적 통념에는 그렇다. 30대 중후반까지도 주변에서 누군가에게 아줌마 호칭으로 불리면 꽤 민감했었는데 오늘만큼은 무던하다. 뭐. 이제는 40대니까. 어쩌면 조금은 뻔뻔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날 먹었던 샤부샤부


저 정도의 뻔뻔함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잠깐이나마 밥 먹기 전 구 씨를 추앙하며, 우리는 푸짐하고 맛있는 점심으로 휴일의 해방감을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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