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그 맛, 추억
어릴 적, 우리 집 가훈은 간단명료했다. 건강. 명랑. 절약. 아버지가 직접 정한 가훈이었는데, 세 단어를 하얀색 페인트로 기다란 돌에 손수 적어 안방에 있는 문갑 위에 세워 두었다. 그때만 해도 문갑은 TV 장식장 역할을 하는 가구였기에 TV를 보다 보면 원하든 원치 않든, 매일매일 봐왔던 여섯 글자. 덕분에, 가훈 그 이상으로 각인된 단어다.
특히, 세 단어 중 아버지 입에 가장 자주 오르내렸던 단어는 절약이었다. 어릴 때, 간혹 밥이라도 조금 남길라치면, 어김없이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알의 밥알이라도 농부의 피땀이 깃든 것이니 남김없이 먹어야 한다.'
부모님의 신혼 시절은 외벌이가 당연한 시대였고, 살림은 엄마의 몫이었다. 신혼 초부터 절약해야 한다고 엄마에게 귀에 딱지 앉도록 말씀하셨다며, 아버지가 아끼라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어머니는 늘 한마디 참견을 했었다. ‘그렇게 아껴서 빌딩이라도 한 채 샀으면 말도 안 해…’
사실, 어머니도 아버지의 잔소리가 따가웠을 뿐. 성정이 아끼고 근면함에 익숙했던 터라 살림살이를 허투루 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부모가 아껴 쓰고 빚지는 것은 큰일이라도 나는 것으로 생각하고 사셨으니 자식들도 자연스럽게 '절약'이라는 단어는 일상에 스며든 단어 이자 가훈 그 이상 의미였다.
그런 부모님이 유일하게 아끼지 않을 때가 있었는데, 돼지갈비를 먹으러 일 년에 두세 번 옆 동네 OO가든을 가는 날이었다. 꽤 어린 시절로 모든 것이 세세히 떠오르진 않지만, 가든이라는 이름답게 초록빛이 가득했었다. 건물로 들어가기 위한 정원 가운데에 돌길이 놓여있고 잉어가 헤엄치는 작은 연못과 그 옆으로는 멋들어진 아름드리 소나무 모습이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이라 실제 정원과 소나무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정원 초입을 시작으로 돌길을 걸을 때, 내가 부잣집 도련님이라도 된 듯한 착각을 줄 만큼 크고 멋진 곳이었다. 그 정원 돌길을 가로질러 달큰한 숯불 향을 맡으며 걷는 그때. 그때가 그렇게 설렐 수가 없었다. 기대와 흥분에 아버지 손을 잡은 채로 총총 뛰듯 걸었다.
일 년에 몇 번 안 되었지만, 우리 집의 유일한 호사였다. 그러나 그 호사는 내가 중학생이 되고 나서 옆 동에 OO가든이 사라지면서 끝이 났다. 시대가 급속하게 변했고 다양한 외식 전문 레스토랑과 백화점 고층에 고급 식당이 생겨났다.
마침, 아버지의 돈벌이도 좀 나아져 우리 집 외식도 다양해진 변화에 맞춰 갈 수 있었다. 몇 번의 행사였던 일이 주기적인 일상에 가까워졌다.
유년기 시절부터 가훈 덕분인지 절약하는 습관은 생활화되었다. 써야 할 때와 말아야 할 때 그 기준이 분명했고, 지금도 꼭 써야 할 때면 필요한 만큼 돈을 액수와 상관없이 지불한다. 하지만, 단돈 100원이라도 불필요한 비용이거나 소비라면 절약하는 버릇은 여전하다.
요즘도 아내와 마트에 가면 세일하는 제품에 먼저 손이 가고, 물건을 살 때마다 가성비가 어떤지 늘 따지게 된다. 아내가 도대체 우리는 세일 여부와 상관없이 사고 싶은 것을 고를 수 있는 거냐며 볼멘소리를 하지만, 그때의 엄마처럼 아내도 씀씀이가 크지 않을뿐더러 아끼는 모습은 부창부수다.
가끔, 마트에서 돼지갈비를 직접 재워 파는 판매대를 지날 때마다 살까 말까를 망설인다. 더 맛있는 음식과 고급스러운 식당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보니 마트에서 파는 돼지갈비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음식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시선을 보내고 있는 나를 보며 아내는 먹고 싶으면 사라고 말을 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린다.
돼지갈비의 맛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이름도 기억나지 않던 OO가든 입구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드는 숯불 돼지갈비의 단내가 그리고 아버지의 꽉 쥔 손길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