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과 반찬의 미학
매번, 늘 하는 일이지만 어려운 선택이 있다. 밥으로 무엇을 먹을지에 대한 고민이 바로 그것이다. 한때는 간헐적 단식이 유행이었던 때가 있었지만 밥 먹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자 욕구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한국 사람들에게 한 끼 밥은 단순히 먹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일상에서 몇 가지만 보더라도 ‘밥’이라는 단어는 많은 뜻을 담고 있다. ‘밥벌이’라 함은 먹고 살기 위한 경제적 행위를 뜻한다. ‘밥 잘 먹고 다녀라’라는 전화 속 부모님의 한마디는 건강 잘 챙기라 말하는 안쓰러움이고, 반대로 ‘식사하셨어요?’라는 전화 속 자식의 물음은 부모님이 별일 없는지에 대한 궁금함의 에두른 표현이다. 그뿐인가? 한국인의 힘은 ‘밥심’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 우리에게 있어 밥의 의미는 남다르다.
그런 밥을 먹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국과 반찬이 있어야 한다. 이를 간단히 말하자면 백반이다. 실제, 사전적 의미로 백반의 뜻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잡곡을 섞지 않고 흰쌀로만 지은 밥이고, 두 번째는 음식점에서 흰밥에 국과 몇 가지 반찬을 끼워 파는 한 상의 음식이다. 한 상 차림을 소박하게 말하자면 백반이고 조금 더 고급의 재료의 반찬을 내고 수가 많다면 한정식으로 이해해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어쨌든, 백반은 쌀밥과 국 그리고 여러 가지 반찬이 있어야 제대로 된 한 상이니 여간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니다. 잔일이 많고 품이 많이 드니 백만 하면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집밥이 연상된다. 그래서 흔히들 백반에 가정식이라는 수식어를 넣어 엄마의 정성스러운 밥과 다르지 않다고 표현하고 싶어 하나 보다.
가족을 위해 소박하게 차려낸 한 상. 밖에서 먹는 백반도 어머니가 손수 해준 밥은 아니지만 배고픈 손님을 위해 정성스레 차려낸 밥상이니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물 종류에 따라 어떤 것은 참기름이나 들기름으로 버무린다. 같은 나물이라도 양념과 간을 간장으로 할 때도 있고, 고추장이나 된장으로 조물조물 무쳐 내기도 하고 동일한 반찬도 상에 올려질 때마다 그 색을 달리하니 매번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또,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끓고 있는 된장찌개가 나오는 날도 있고 제철 야채를 넣은 된장국이 나오기도 하니 하얀 쌀밥과 매번 달라지는 반찬과 국을 먹는 재미가 더 해져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다. 더하여, 반찬 중에 흔하게 접하지 못하는 주인장만의 특별한 장아찌나 나물이라도 만나는 날에는 과식하기 마련이다.
어릴 적에는 소시지, 햄이 최고로 맛난 반찬이었고 내게 나물은 모두 똑같은 풀때기이자 먹기 싫은 반찬이었다. 그런 나이 때, 제사를 지낸 다음 날 도시락 반찬은 여지없이 제사상에 올려졌던 음식이었다.
제삿날에는 약과, 산자 등을 먹을 수 있어서 신이 났지만, 다음날 도시락에는 삼색 나물이 항상 빠지질 않았다. 도라지, 고사리 그리고 시금치. 특히, 하얗게 볶아낸 도라지는 어린 입맛에는 제일 맛이 없었고, 어머니에게 종종 도라지만이라도 싸지 말아 달라고 투덜거리곤 했다.
지금은 본가에 갈 때마다, 얻어 갈 반찬은 없는지 냉장고를 괜스레 기웃거리고, 제사라도 지내는 날이면 제사 후 나물을 꼭 싸 온다. 다음날 집에 가져온 나물로 아내와 함께 비빔밥을 해 먹는 일은 투덜거림이 아니라 콧노래가 나오는 일로 바뀌어버렸다.
나물이 가진 본연의 향취를 음미하고 밥의 고소한 단맛을 오롯이 느끼는 나이가 되었다. 입맛이 변한 것이 아니라 맛의 깊이를 아는 연륜이 쌓여간다. 나이가 든다는 게 좋을 것 하나 없지만, 그래도 굳이 하나 찾아본다면 맛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어렵게 찾은 기쁜 일 중에 하나다.
살아온 날이 늘면서 접하기 어려웠던 음식을 먹을 기회가 많아졌고 또, 경험이 쌓이면서 맛에 대한 깊이와 함께 폭도 넓어졌다. 먹을 것도 넘쳐나고 맛있는 것도 많지만 따뜻한 밥과 정성으로 만든 반찬으로 차려낸 백반 한 상이야말로 늘 먹어도 질리지 않는 가장 포근한 한 끼가 아닐 수 없다. 오늘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지 고민이 될 때마다, 나는 주저 없이 백반을 고른다. 오늘은 어떤 반찬일까 하는 즐거운 기대와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