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서 장르만 로맨스라는 영화를 보다가 이런 대사를 들었다. 상처를 받는다는 건 결국 바라는 게 있었다는 말이다. 왜 이 대사가 나에게 남았는지 나는 잘 안다. 나의 상처, 내 내면에 남아있는 많은 것 그게 상처다. 상처는 스스로 과거로 돌아가 현재의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하며 치료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상처는 사실 곪는다. 수술도 힘들고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는 수단이 된다. 나 역시 많은 상처가 있다.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 상처는 나 스스로 혼자서 받은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나는 상처받았다. 그리고 치유를 못했고 불쑥 결정적인 순간에 튀어나온다. 정말 평온하게 지내는 일상에서 평범한 햇살을 보다가도 나오고 비 내리는 우중충한 날씨에 빗방울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온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일부러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게 사회생활이라고 포장되었다. 사회생활 이전 받았던 상처는 타인에 의해 우연히 받게 되었다. 나는 사실 그 상처라는 것에 대해서 의구심이 있었다. 왜 나는 상처받은 영혼을 가지며 살고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영화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그건 상대방에 대한 바람이었다. 내가 나 스스로 정한 테두리에 갇혀 스스로를 옥죄었다. 상대방에게 기대라는 것을 하면서 나는 채워지지 않는 상처를 받게 된 것이다.
기대한다는 건 그건 어쩌면 욕심이다. 상대방은 나만큼 나를 잘 모른다. 그게 부모 아니면 형제일지라도 절대로 모른다. 결국 내가 상처를 안 받으려면 상처의 깊이를 곰곰이 생각해 보고 상처받았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나에게 말해줘야 한다. 상대방은 너를 모른다고. 너를 잘 아는 건 나밖에 없고 결국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보듬고 위로해 줘야 한다는 걸 말이다.
상처받았던 그때의 나로 돌아간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스스로를 치료할까? 에 대해서 잘 몰랐는데 이제야 알겠다. 절대 누구에게도 바라지 말라는 것. 바라지 말아야 하는것. 그냥 내가 좋아서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이고 내가 좋아서 이 일을 하는 것이라고.
바라는 것이 없어지게 된다면 상처도 덜 받고 내가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현명한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