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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빛 Oct 23. 2021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시작하다

기간제 교사의 기억

 세 차례의 불합격 후 더 이상 공부에만 매진하는 수험생으로서 지펴야 할 마음의 불씨가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런 소속 없이 공부만 하는 것은 잘못된 삶이라고 생각되었다. 불합격 문구가 머릿속에 각인된 후 며칠 동안은 다시 방 안에 틀어박혀 미동도 없이 지냈다. 그러려니 하는 부모님의 눈길에도 아랑곳 않고 그저 자기 연민에 빠져 살았다.


 다만, 재수 실패 후 끝없는 자기 비난과 정서적 학대를 자행했던 것과 달리 제 역할만 잘하면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성과를 손에 쥘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졌다. 경력란을 채울 수 있는 번듯한 '노동'에 대한 열망이 강렬해졌다. 임용 합격이 아닌 '교사'가 먼저 되어보고 싶었다. 아까운 시간과 체력을 교사가 되기 위해 쏟아부었다면 어디 그 교사라는 직업이 자신에게 맞는지 시험해보고 싶어졌다. 혹시나 어렵게 임용고시에 합격하고 교사가 되었는데 적성에 맞지 않는다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지 않은가.


 이번에는 '불합격'을 인생의 실패자라는 낙인이 아닌 또 다른 기회로 삼아보기로 했다. 이에 기간제 교사 원서를 방방곡곡으로 써낸 결과 본가에서 자차로 10분 거리의 인문계 여고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기간제 합격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애초에 첫 근무지로 희망하던 고등학교가 한 군데 있었다. 그 외에도 마음속으로 희망 근무지를 여러 곳 정해놓았지만 가리지 않고 왕복 3시간 거리 이내의 학교에 원서를 모두 썼다. 경력이 전무하여 필패를 예상했으나 생각 외로 면접에 불러주는 학교가 많았다. 물론 들러리인지는 미지수였지만.


 그러자 좀 더 좋은 학교에서 근무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일 순위로 희망했던 학교는 예상대로 서류에서 떨어졌지만 두 군데 학교에서 기간제 합격 통보 연락이 왔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학교에서 근무를 할 거라면 차라리 다시 '올인'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합격하였지만 죄송하게도 근무하지는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남은 인생을 올인하는 수험생으로 살아야 할지, 병행하는 수험생으로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찰나 기적적으로 일 순위로 희망했던 학교에서 급히 연락이 왔다. 새 학기 직전 기간제 교사로 합격했던 분께서 의사를 번복하여 해당 자리가 공석이 된 것이다. 분명 그분과 최종 면접까지 경합을 벌였던 다른 선생님이 있었을 텐데 이 학교에서는 인력풀을 통해 아예 새로운 사람을 찾았고 나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밖에 생각할 도리가 없었다. 걱정 반, 설렘 반으로 거의 면접과 동시에 계약을 하고 그렇게 교사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기간제 교사로 스물일곱을 맞이하며 낙오자라는 생각을 애써 '재도전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바꾸기로 마음먹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시시때때로 '나는 기간제가 되기 위해 그토록 나 자신에게 투자했구나. 이렇게 한심하게 살기 위해서.'라는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전신을 지배했다. 괴로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자리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또 감사하며 하루를 버티기 위해 애썼다.


 근무 일주일 전, 학년과 담당업무, 교과서를 배정받았다. 1학년 전담이며 감사하게도 비담임이었다. 근무 첫날, 너무나 긴장돼서 출근길에 처음 나에게 말을 건 학생에게 공손히 존댓말을 한 기억이 난다.(그 학생은 속으로 놀랐을 것이다.) 별것 아닌 일에 쉽게 함성을 지르고 감정표현이 솔직하고 거침없으며 예쁜 말을 서슴없이 해주는 여고생을 첫 제자로 삼으며 교직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임용에 합격한 예비교사는 새 학기 발령 직전에 교육청 주관의 공인된 전문가들로부터 수업, 학생지도, 평가, 행정업무에 대한 연수를 받는다. 실제로 도움이 되는지의 여부를 떠나 어쨌든 교사가 될 준비를 하고 학교에 투입되는 것이다.


 하지만 초보 기간제 교사의 절대다수는 선배 교사들의 가르침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현장에 내던져진다. 즉, 무기 없이 전쟁터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일 년간 새로운 몇십 명의 아이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담임으로서의 부담은 없었다. 하지만 교탁에 서 있는 나만 쳐다보는 수 십 명의 아이들 앞에 나설 준비는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개학 첫날 첫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에 수업에 대한 이론만 어지럽게 널려있던 마음속 서재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자기소개, 수업 계획 등 무엇을 어떻게 말할지 대략적인 개요는 마련했지만 무려 50분이나 되는 수업 시간 동안 온전히 나만 떠들 자신이 없었다. 수업 시작 종이 치고 무표정하게 교재를 챙겨 교실로 향하는 선생님들이 너무나 대단해 보였다.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해서 발을 땅에 붙이고 망부석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일어서지 않으면 그 교실에는 임장 하는 교사가 아무도 없게 되므로 큰일이다. 실에 매달린 모빌 인형처럼 교실과 내 몸을 잇는 무형의 밧줄로 묶여있다는 상상을 하며 교실로 무겁게 발을 옮겼다.


 교실 문을 열기 직전까지도 '지금이라도 뒤돌아서 가서 아직 준비가 안됐으니 학교를 다닐 수 없다고 해.', '아냐, 누구나 시작은 있으니까 일단 부딪혀 보자.'라는 두 목소리가 뒤엉켰다. 복잡한 심경과 백지장 같은 머릿속을 애써 감추고 스물네 명의 아이들과 첫 대면을 했다. 몇 초 간 정적이 흘렀다. 아이들도 입학 첫날, 첫 시간이니 긴장했을 터. 하지만 제삼자가 이 상황을 지켜봤다면 교탁에 서서 수업을 하는 당사자가 더 긴장한 상태로 보였을 것이다.


 첫인상이 중요하니 밝게 인사하고 이름을 칠판에 적었다. 글씨를 예쁘게 못쓰기에 초록 칠판에 분필이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화이트 칠판에 보드마카가 구비되어 있었다. '와아-'하는 환호와 박수 소리 후 이내 또 정적. 지금이라면 첫 시간에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을 다 하기에는 50분도 부족하다. 하지만 첫 국어 수업에서 시작 5분 만에 소재 고갈을 느꼈다. 어색하게 비어있는 오디오로 인해 심장이 다시 요동치는 순간 아이디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아이들의 자기소개도 한번 들어 보자.' 일 년 동안 일주일에 3-4번은 마주할 아이들이니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 소개하는 것을 들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너무나 기특하게도 순순히 (급작스러운) 자기소개 챌린지에 따라주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의 간단한 자기소개를 모두 끝내니, 무려 시간이 10분이나 남았다. 수업에 공백을 둘 수 없다는 이상한 철칙을 갖고 있던 터라 곧바로 교과서를 꺼내 수업을 시작해버렸다.(...) 이렇게 좌충우돌 첫 수업을 마무리하며 정신없는 '교사'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평생 학생, 수험생으로서의 삶 말고는 아는 것이 없던 이전의 인생을 갈아엎고 전혀 새로운 스테이지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개학 첫 주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일의 요령도 없고, 경험도 없고, 순서도 제대로 모르니 하는 것 없이 바빴다. 하나를 질문하면 모르는 것이 열 개가 생기고 열 개를 알면 스무 개의 질문이 샘솟아 마음이 답답했다. 이제 어떻게 하는지 조금은 알고 업무를 시작하려고 하면 야속하게도 수업 시작 종이 쳤다. 이 정도로 극심한 '바쁨'은 난생처음 겪어본 것이기에 기력이 달리는 것이 분 단위로 느껴졌다. 몇십 명의 아이들 앞에서 목소리를 크게 내는 데 체력이 엄청나게 소모되다 보니 식은땀을 너무 흘려 결국 임용 수험생 때도 안 먹던 보약을 맞춰 복용했다.


 드디어 첫 주의 금요일, 퇴근하기 위해 책상을 정리하며 달력을 보는데 3월, 아니 일 년이 한참 남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렇게 힘들고 바쁜 일이 일 년이나 지속된다고? 게다가 합격할 때까지는 임용 시험에 계속 응시하리라 마음먹었기 때문에 마지막 남은 체력을 쥐어짜서라도 임용 공부와 병행해야 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같은 성별이기도 하고 나이 차이가 (많았지만) 그렇게 크지는 않았던 덕에 수업하는 것이 점점 재밌어졌다. 아이들이 재밌어하는 이슈는 어제 친구들과 나눈 대화의 주제였으며 내가 궁금해하는 것, 좋아하는 것은 곧 아이들의 관심사였다. 아이들끼리 나누는 대화 속 용어에 모르는 것이 없었기에 아이들은 쉽게 마음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노량진의 좁은 책상에서 수많은 프린트물에 파묻혀 책과 씨름만 하다 온 나였다. 거기다 세상의 온갖 쓴 맛과 나쁜 감정은 다 느낀 탓에 자존감이 많이 깎인 상태라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어 선뜻 아이들이 친밀하게 다가오는 것을 다 받아주기 힘들었다. 너무나 서투른 대인관계 능력을 지닌 생 초보 교사라는 생각과 함께 불합격 앞에서 좌절하던 불행한 과거가 울컥 치밀어 올라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선을 넘으려고 하면 금세 정색하고 딱딱하게 수업만 하기도 했다.


 '올해 아이들과 친해지기는 글러 먹었다.'며 마음이 조금 쓸쓸해지려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놀라운 현상을 경험했다. 나에 대한 아이들의 호의와 선심, 호감은 생각보다 거대했던 것이다. 젊다는 것에서 동질감이 작용했던 것일까. 내가 했던 사소한 말, 행동을 다 기억해주고 내가 조금이라도 친밀하게 대하거나 조언을 하며 아이들이 겪었던 작은 일에 몇 마디 공감의 말을 건네면 너무나 좋아해주었다. 직접 만든 프린트물, ppt를 보며 감사하다고 했고 수업마다 눈을 빛냈다. '선생님, 너무 재밌어요!', '다른 수업도 선생님이 해 주세요!' 등의 말로 메마르고 갈라진 자존감에 새싹이 피어나게 했다.


 한 번은 방과 후 보충 수업 시간이 교체되어 원래는 수업이 계획된 교실이 아니었던 학급에 들어가자 아이들이 기립박수를 치며 환호를 했다. 어리둥절하여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그냥 선생님이 들어와서 좋다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고 간 날이면 탄성을 질렀다.(정말이다.) 매일 쏟아지는 칭찬과 애정 표현에 정신이 없었다.


 원래 담임을 안 하면 아이들과 사이가 좋다고들 한다. 생활지도를 건너뛰고 좋은 말만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첫 교직 생활에서 만난 아이들과의 관계는 내 기준으로 엄청나게 성공적으로 맺게 되었다. 이 아이들은 담임이든, 비담임이든 어떤 식으로 만났어도 이렇게 행복했을 것 같다. 물론 0교시나 1교시는 졸음에 사경을 헤매는 아이들을 깨우고 달래고 다그치느라 진땀을 뺐다. 수업은 여전히 체력적으로 버거웠지만 적극적으로 소통해오고 먼저 좋아해 주는 아이들 덕에 학교 올 맛이 났다. 주말이면 또 어떤 이야기로 교실을 가득 채우고 웃음을 터뜨릴까 기대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업무적으로는 스키마가 전혀 없었으므로 일처리 과정에서 다른 선생님들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 감사하게도 아무것도 모르는 신규에게 친절히 모든 것을 알려주는 선생님들이 많았다. 정말 여러모로 행운이었다. 워낙 덤벙대고 정리도 못하는 탓에 첫 직장에서 남에게 폐나 끼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부모님의 걱정이 무색하게 생각보다 하루하루 잘 해내고 있었다. 퇴근하면 몸과 정신이 공부를 거부했으므로 잠에 들기 바빠 공부 시간은 거의 확보하지 못했지만 엄마에게 첫 교직생활의 소감을 이렇게 남긴 것이 기억난다.


 "엄마, 진작에 시작할 걸!"

 


일찍 책장을 덮지 말라.
삶의 다음 페이지에서 또 다른 멋진 나를 발견할 테니
-시드니 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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