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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빛 Oct 23. 2021

첫 담임, 첫 우리 반

잘 해내고 싶었는데

 기간제 첫 해의 학교는 '파라다이스'라고 칭하겠다. 예쁜 아이들, 수업 전 재밌는 스몰 토크, 수업 돌입 후 집중하며 반짝이는 눈망울... 어설프고 서투른 발문에도 적극적으로 대답해주는 아이들의 모습에 벅찬 수업과 업무 속 하루하루 성취감을 느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학교 일이 힘들다고, 수업이 진 빠진다고 어리광 피울 수 없는 노릇이다. 내가 정한 나의 본모습은 '임용을 앞둔 수험생'이었으니까. 임용 디데이를 핸드폰 첫 화면에 띄워놓고 '공부하지 않는 수험생'이라는 죄책감에 매일 시달리며 우여곡절 첫 학기를 끝냈다.


 방학부터는 공부 시간을 확보할 수 있으니 이제는 임용시험 준비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임용 재수 시절 다녔던 독서실을 다시 등록하여 수험생 모드에 돌입했다. 방학 때는 그럭저럭 공부할 수 있었으나 새 학기가 시작되자 학교 생활의 여운이 잠들기 직전까지 가시지 않았다. 온 기운과 혼을 수업과 업무에 다 빼앗기고 나면 겨우 눈만 뜰 수 있는 기운만 남았다. 병든 닭처럼 독서실 내 자리에 앉아 꼬박꼬박 졸며 왼손에는 덜 푼 기출문제를, 오른손에는 펜을 쥔 채 휴먼졸림체로 답을 끄적이고 밤 12시가 되면 허탈하게 집에 돌아오기 일쑤였다.


 공립 임용 시험공부에 주력했지만 사립 임용 시험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전국 교육청에 올라오는 모든 사립 임용 공고를 샅샅이 읽었으나 모두 지원하기에는 시험 날짜가 너무 많이 겹쳐 본가와 가까운 중소도시, 광역시의 사립재단 시험에만 응시하기로 했다. 나름 임용 공부 이력이 길고 기간제 경력이 있다는 것이 도움이 되었는지 사립 필기시험에 응시하면 절반 정도는 1차 필기에 합격하고 최종 면접까지도 올라가게 되었다. 하지만 번번이 불합격의 쓴 맛을 보았다. 아직은 역량이 부족한 탓이다. 정교사의 꿈은 네 번째 임용고시 불합격과 2월 둘째 주, 마지막으로 응시한 사립재단의 합격자 발표에서 내 수험번호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을 끝으로 다음 해를 기약하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재직 중인 학교의 계약 기간이 연장되어 이번에는 '담임'으로서 아이들을 만나는 새로운 기회를 마주하였다.




 '전체 교직원 회의'가 아닌 '학년 회의'에 1학년 담임 자격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동학년 담임 선생님들은 다들 너무나 좋으신 분이었다.(이 학교에서 만난 같은 학년 담임 선생님과 다른 과목의 선생님이었던 착하고 예쁜 두 분과는 지금도 좋은 인연을 지속하고 있다.) 공평하게 반을 추첨하고 몇 번이나 접힌 종이를 펼치니 낯선 이름이 출신 중학교와 함께 한 페이지 가득 적혀있었다. 이제부터는 이 아이들을 위해 남다른 책임감으로 교직 생활에 임해야 하며 업무 또한 몇 배로 늘어날 것이라는 생각에 부담이 앞섰지만 언젠가는 맞닥뜨릴 일이라고 생각해 왔으므로 잘해보자는 굳센 각오를 다졌다.


 담임은 3월이 되기 전, 학급의 아이들과 먼저 만나 서로를 소개하고 앞으로의 학교 생활 규칙을 안내해야 했다. 모든 것이 어색할 우리 반 아이들을 위해 있는 말, 없는 말 해가며 분위기를 유쾌하게 하기 위해 애썼다. 산더미 같이 쌓인 안내 사항과 교칙을 공지하고 교탁에 널려 있는 가정 통신문과 교과서를 모두 배부한 것을 끝으로 새 학기 준비를 마쳤다. 이미 아이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한 경험이 있으니 이번에도 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실상은 기대와는 많이 달랐다.


 담임 첫 달, 작년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은 엄청난 호감을 보였다. 선생님이 담임 선생님이어서 너무 좋다는 말과 함께 개별 상담이 끝나면 이야기를 잘 들어주어서 고맙다는 내용의 귀여운 쪽지도 건넸다. 수업에 대한 호응도 좋고 작년보다 더 거침 없어진 애정 표현에 부끄러워하며 그에 맞는 적절한 화답을 해주지는 못했지만 내심 행복했다. 아이들의 적극적인 호감 표시에 그저 '잘하고 있구나.'라는 자만에 빠져 정작 중요한 것을 알아내지 못했다. 학급 내 아이들의 상호작용과 사소한 감정 변화, 교우 관계에 작은 금이 생겨 갈라지고 있는 것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교직 두 번째 해, 서투른 갈등관리 능력으로 인해 담임과 아이들 사이에 '오해'라는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크게는 두 가지 사건이 벌어졌으며 작게는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로 인해 학급 인원이 변동되는 일도 있었다. 아직도 씻기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다. 담임인 나조차도 아직 이렇게 아픈데 당사자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너무나 여리고 어린 시기에 갈등과 단절, 이별을 경험한 것이다. 반 아이들은 감정 표현에 서툴렀으며 좋은 감정과 싫은 감정이 널뛰기를 할 때 조절하는 방법을 몰랐다. 어른으로서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미안한 감정이 들거나 야속한 감정이 들 때면 친구에게 어떻게 먼저 다가가야 하는지 차근차근 알려줘야 했다.


 아이들이 서로 등을 돌리게 되면 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것보다 더 차가워진다. 담임교사는 학급 분위기가 화목하든 그렇지 않든 아이들을 끝까지 이끌어야 한다. 교실 속 아이들이 나에게 보냈던 작은 신호들을 알아채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어떻게든 다시 끊어진 관계를 이어 붙이고자 꾸준히 상담 선생님을 찾아가고 솔루션을 얻으며 이를 바탕으로 반 아이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몇 명의 아이들은 담임이 반 아이들에게 제대로 신경 쓰지 않았다며 '애들에게 신경 좀 쓰세요. 선생님은 공평하지 않아요. 우리에게 관심 좀 주세요.'라며 화살을 쏘았다. 담임으로서 학기 초부터 반 아이들과 시간을 더 보내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름 최선을 다하여 상황을 풀어나갈 해결책을 나눴다고 생각했지만 각자의 생각에 갇혀 서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첫 담임이라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잘 이끌어가고 싶었던 나는 모든 것을 망쳤다는 생각에 매일 눈물로 교무실 문을 마지막으로 나섰다. 하루가 갈수록 야위어갔다. 음식이 전혀 넘어가지 않았고 친한 선생님들과 소소한 대화도 할 수 없었다. 사건이 터진 날이면 근 한 달은 꼼짝없이 상담을 하고 일지를 남기고 학부모의 항의 전화에 죄송하다는 말을 연발하며 밤 10시, 11시에 퇴근해야 했다. 그 해 가을은 거의 교직 생활의 위기였다. 못 견디겠다는 생각이 처음 든 것이다. 감정을 소모하며 온갖 나쁜 감정으로 나를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남몰래 우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하지만 본분을 잃어버릴  없었다. 합격하는 순간을 맞기 전까지 나는 '임용 수험생'이었다. 10, 11시에 퇴근하면 눈물을  닦고  길로 집에 돌아가 모자를  눌러쓴  쏜살같이 독서실로 튀어갔다. 모두가 귀가하는 시간에 적막한 독서실에 앉아 전공 서적을 펼치고 펜을  눌러 잡으면 '아이들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 네가 무슨 교사야.'라는 생각이 쏟아져 애써 참았던 눈물이 다시 뚝뚝 떨어졌다. 자신이 너무나 무능하게 느껴지며 교사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머리 위로 쌓여 있는 책과 프린트물을  내던져버리고 싶었지만 스스로를 속일 수밖에 없었다.


 '잘 될 거야. 조금만 더 참아보자.'

 '이것만 오늘  풀면 내일은 쉬어도 .'


 그러나 참아야 하는 일과 공부량은 조금이 아니었으며 오늘 공부량을 끝내면 내일은 그보다 더한 공부량을 정하고 자신을 채찍질했다.  악물며 하루에 해야  분량을 끝내고 1, 2시에 귀가했다. 매일 낭떠러지에 추락하는 기분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임용 공부는 올해를 끝으로 더 이상 못 하겠구나.'


 주어진 업무와 수업이 있었기에 체력에 부친다고, 몸이 말을  듣는다고 주저앉을  없었다. 감정이란 감정이 모두 소진되어 잿가루가 되었지만 학교도 직장이므로 절대  내면  된다는 생각에 부여된 일을 모두 해치우고 시간표대로 계획된 진도와 평가 계획을 충실히 지켰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 학급 운영과 업무, 공부에 치이는 현실이 버거워 눈물이 나올  같으면 화장실,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 가서 감정을 쏟고 무표정으로 잽싸게 자리로 복귀했다.(이때 이기주 작가님의 '언어의 온도' 매일 읽으며 많은 위로를 받았다.)


 비록 어그러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끝까지 아이들과의 관계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한명 한명이 내가 돌봐야  아이라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가디건만 입어도 되는 날씨에도, 패딩 없이는 나갈  없는 날씨에도 업무와 수업, 상담을 모두 끝내고 나면 수험생이라는 정체성을 주워 입고 독서실로 다시 '출근했다'. 몸도 마음도 엉망진창이었지만 어느  하나 포기하지 않으며 다섯 번째 임용 시험을 마쳤다.




 절대적인 공부량은 올인하던 때보다 훨씬 부족했다. 그야말로 ‘울면서 공부’하며 눈 질끈 감고 온갖 풍파에 맞서 싸우던 모습을 측은히 여기기라도 하듯 예상치 못하게 수험 생활이 종료되었다. 더 이상은 못하겠다며 벼랑 끝에 몰린 것처럼 공부한 끝에 합격자 공고문에서 내 수험번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안이 벙벙하여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독서실을 더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럽게 여겨졌을 뿐이다.


 다른 학교로 발령이 예정되어 학기 종료 이틀 전, 반 아이들에게 이제 학교를 떠나게 되었음을 알렸다. 내 예상과는 달리 아이들은 너무나 마음 아파했다. 펑펑 우는 아이도 있었다. 마지막 날, 반 아이들은 감사하다며 평생 잊지 않겠다는 메시지와 함께 환대한 이별 선물과 영상 편지, 이벤트로 교실을 가득 채워 주었다. (이 날 남긴 사진 속의 나는 죄다 너무 울어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있다.)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좀 더 성숙한 어른으로서 너희들의 표정과 행동, 마음을 빨리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서로의 앞날을 축복하며 다음 만남을 기약한 우리는 온갖 감정으로 점철된 일 년이라는 시간을 각자의 서랍 속에 고이 넣어두었다.


 첫 담임이었던 아이들과는 지금도 꾸준히 연락하고 있다. 새로운 학교에서 맞이한 스승의 날에, 익숙한 교명이 적힌 편지가 교무실 내 자리로 스무 통이나 전해져 왔다. 매주 아이들과 손글씨로 소통했던 덕에 눈에 익은 글씨들이 ‘보내는 사람’ 란에 예쁘게 적혀있었다. 나의 안부를 걱정하는 말과 함께 선생님이 너무나 보고 싶다고, 선생님처럼 제 말을 잘 들어주는 선생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마음들을 읽어나가며 힘들었던 그 해의 감정이 솟아 올라 눈물샘이 또 터져 버렸다.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다가가 이야기를 들어주려 애쓰는 담임의 마지막 날갯짓이 아이들 눈에도 안쓰러워 보였던 것 같다.


 아이들의 마음을 담임 마음대로 이끌 수 있다는 생각은 크나큰 착각이다. 하지만 관계의 끈을 이어 나가기 위한 헌신은, 언젠가는 누군가의 마음에 진심이라는 형태로 닿는다.


 역시, 아이들은 예쁘다는 내 생각이 맞았다.



다른 이들의 삶에 빛을 가져다주는 이는 자신도 그 빛으로 밝아진다.
– 제임스 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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