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인 점은, '수능 한파'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다지 춥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년보다 높아진 기온 덕분에 오늘 시험에서는, 수능에 대한 긴장도 조금이나마 덜 되었으리라 기대해 본다.
1. 공통 과목 - 독서
최근 평가원 기출 문제를 꾸준히 풀어온 학생들은, 첫장을 펼치자 마자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을 것이다. 1~3번 문제는 예측대로 독서 관련 지문이 출제되었으며 올해 수능은 독자 요인 및 독서를 통한 소통의 즐거움을 소재로 하였다. 3-4분 정도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음으로, 4~9번 문제에서는 주제가 비슷한 두 지문이 연계되어 출제되었다. 예상 소요 시간은 15-16분 정도이다. (가) 지문은 '고려~조선 시대 중국 유서의 수용 양상과 변천'을 다루었고, (나) 지문은 '조선 후기 유서에서의 서학의 수용 양상'을 다루었는데, 지문 내용이 익숙하다. 2023학년도 6월 평가원 4~9번 문제의 지문과 매우 유사한 내용이 출제되었다.
6월 평가원에서 출제된 (가), (나)형 지문도 ‘역사서 편찬’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 다만, 6월 평가원은 ‘역사서’에 초점을 맞추어 내용이 서술되었고, 수능에서는 ‘유서’의 편찬과 서학의 수용 양상에 맞추어 서술되었다는 점이 차이라고 볼 수 있겠다.
4, 6, 9번 문제는 평이하나, 8번이 그 중에서도 약간 어렵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문에 근거하여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가 서학 중국 원류설을 반영하였다는 내용에 주목한다면, 오답을 금방 찾아낼 수 있다. 그러므로, 난이도가 매우 높은 문제는 아니라고 판단된다.
세 번째 비문학인 10~13번 문제는 법, 사회 지문에 해당하는 문제로, 12번 문제가 까다로웠다. 채권-채무자 간 위약금 및 손해배상 관련 지문으로, 법, 사회 파트가 가장 취약한 수험생의 경우 매우 어렵게 느껴졌을 것이다.
다만, 2023학년도 9월 평가원 시험에 출제된 ‘사유 제산 제도’라는 법 관련 지문은 '제도, 법'을 다뤘다는 점에서 10~13번 지문의 주요 소재와 맥을 같이 하므로 9월 평가원 시험에서 해당 지문을 유심히 읽어 본 학생이라면 차분히 풀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해당 세트에 출제된 4문제 중 가장 난해한 문제는 12번 문제였다. 하지만, 2문단을 잘 읽으면 풀 수 있는 문제였다. 위약금의 성격 규명 여부 및 법원의 감액 가능 여부 등을 잘 판단하였다면, 무난히 풀 수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마지막 비문학인 14-17번 문제에 해당하는 지문은 과학 지문, 생명과학 관련 소재인 '기초대사량'을 다뤘다. 비문학 전체를 통틀어 가장 어려웠던 지문이다. 수능 시험장에서 맞닥뜨린 L-그래프와 게딱지 그림은, 특히 생명과학을 하지 않은 인문계 학생들에게 멘붕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다른 지문에서는 쉽게 넘어갈 수 있었던 일치 불일치 문제, 추론 문제도 이 지문에서만큼은 풀기에 쉽지 않았을 것이며 특히 17번 문제가 가장 헷갈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당 문제를 풀며 다시 한번 느낀 것은, 과학 관련 지문의 경우 상식으로 푸는 것은 절대 금물이며, 철저히 지문에 제시된 정보를 바탕으로 풀어야 실수가 없다는 것이다. 15번 문제의 경우, 정답은 4번인데 '체중에 비례하여'라는 문구를 막연히 '맞겠지'라는 생각으로 지나갔다면 엉뚱한 답을 정답으로 체크하는 불상사가 발생했을 것이다. 19세기 초기의 기초대사량에 대한 연구와 클라이버의 기초대사량에 대한 연구를 잘 비교하였고, 그래프를 읽는 방식을 지문에서 잘 찾아냈다면 17번 문제도 어렵지 않게 풀었을 것으로 예상한다.
비문학의 경우, 앞서 까다로웠다고 언급한 문제 외에는 전반적으로 일치 불일치 문제, 어휘 문제 등이 상대적으로 예년 수능에 비해 평이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2. 공통 과목 - 문학
문학의 경우, 모든 문항이 평이했다. 비문학의 킬러 문항에서 시간을 다 잡아먹고, 문학으로 뒤늦게 진입한 학생이라면 억울한 감정이 들 정도로 쉽게 출제되었다.
먼저, 고전 소설로는 조위한의 '최척전'이 출제되었다. '최척전'은 연계교재인 2023학년도 수능특강의 갈래복합 파트에서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윤흥길)'와 함께 실렸지만, 수능에서는 단일 지문으로 등장하였다. 난이도는 평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방과후 시간에 수업한 지문이어서 매우 반가웠다.)
다음으로, 고전 시가는 이황의 '도산십이곡'이 출제되었으며 이 작품 역시 수능특강의 실전학습 2회에 실린 시가이며 원문은 총 12수인데, 수능에서는 1, 2, 6수만 발췌되어 출제되었다. 역시 평이했다.
고전 시가의 경우, 2023학년도 6월 평가원에서 황희의 ‘사시가’가 출제되었고, 9월 평가원에서 이현보의 ‘어부단가’가 출제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자연친화’라는 테마가 3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출제된 점이 주목할만 하다. 다음 수능을 대비할 때는 고전 시가만큼은 평가원 시험에서 반복되는 주제 위주로 공부하는 것이 옳은 학습 방향일 것이다.
세번째, 현대시는 나희덕의 '음지의 꽃'이 출제되었고 연계 교재인 2023학년도 수능완성의 실전학습 2회에 실려있으며 난이도는 역시 평이하다. 다만, 수능완성에서는 대립적 의미를 지닌 시어를 바탕으로 주제 의식을 구현하는 시로 제시되었지만, 수능에서는 황폐화된 현실 속 강인한 생명력을 구현하는 시로 제시되었다. 작품에 대한 문제는 약간 다르게 나왔지만, 푸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을 것으로 예측된다.
다만, 6월 평가원에 출제된 현대 시이자 수능특강 연계 지문인 신동엽 ‘향아’가 '건강한 생명력의 회복을 희망'을 주제로 한다는 점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노래하는 나희덕의 ‘음지의 꽃’과 일맥상통한다. 평가원-수능에서 유사한 주제의 시가 출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비연계 작품으로는 강호 가사 - 김득연의 '지수정가', 현대 수필 - 김훈의 '겸재의 빛', 현대 소설 - 최명희의 '쓰러지는 빛', 현대시 - 유치환의 '채전'이 출제되었다. 비연계 작품이라고 해서 크게 어렵게 느껴지는 지문이나 문제는 없었다.
최명희의 '쓰러지는 빛'의 경우 성장 소설이며 어린 아이를 서술자로 하는데, ‘집’의 변화에 대한 화자의 시각을 산문으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2023학년도 6월 평가원에 출제된 공선옥의 수필 ‘그 시절 우리들의 집’과 소재가 매우 유사하다고 볼 수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문학에는 킬러 문항이 없었으며 딱히 헷갈릴 선지가 없었다.
3. 선택 과목
화법과 작문, 언어와 매체의 경우, 역시 까다로운 문제는 없었다. 화작의 경우 평소 EBS 연계 교재와 기출 문제를, 언매의 경우 문법 개념과 EBS 연계 교재, 기출 문제를 충실히 풀어왔다면 실수 없이 무난하게 풀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 수능에서도 증명되었듯이, 국어가 다른 과목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학생들은, 반드시 문학 파트를 먼저 풀고 비문학 문제에 진입해야 한다. 그래야 본인이 열심히 푼 문제의 정답률을 높이고 최대한의 점수를 가져갈 수 있다. 또한, 6월, 9월 평가원의 지문 및 작품 분석을 소홀히 하면 안된다는 것을 한번 더 상기할 수 있었다.
문학이 쉬웠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년보다 난이도는 다소 낮았다고 볼 수 있다.
예상되는 1등급 컷은 화작의 경우 89-91점, 언매의 경우 87-89점 정도일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 학생들은 4교시 탐구과목 시험을 치르고 있을 것이다. 몸의 긴장은 모두 풀렸겠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므로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을 기대해 본다.
오늘이 저물면, 학생들은 저마다 짊어진 무게를 내려놓고, 지나온 시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자유로움을 만끽하게 된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을 넋놓고 흘려 보내기만 한다면, 자칫 길을 잃고 방황할 수 있으므로 앞으로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가 숙고하는 시간을 보냈으면 한다.
오늘의 가채점 결과로 학생들은 수시 최저를 맞추었는지, 정시로는 어디에 진학할 수 있을지 고민의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 아이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다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더 큰 가능성을 열어주어야겠다고 다짐하는 하루다.
세종께서 말씀하시길, "그대의 자질은 아름답다. 그런 자질을 가지고 아무 것도 않겠다 해도 내 뭐라 할 수 없지만, 그대가 만약 온 마음과 힘을 다해 노력한다면 무슨 일인들 해내지 못하겠는가. 그러니 부디 포기하지 말길." - 세종 22년 7월 21일